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대머리 Jul 12. 2023

와이프는 페미니스트 끝판왕

카테고리 -부부

와이프가 원하는 데로 기꺼이 해주기로 했다. 굳이 여자와 다투거나 여자의 성질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 들어서이고 몇 번 이런저런 이유로 크게 다툰 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도대체 그 이유가 왜 다툴 이유가 되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 결정적으로 자존심 하나 지키려고 죽자 자 와이프와 다툰 이후 공허한 후회가 밀려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 요즘 매사 편하고 좋다. 와이프가 원하는 대로 해주니 와이프가 좋아해서 내가 좋았고 그 결과가 나쁘게 나오더라도 내 책임이 아니니 그것 또한 좋았다. 신혼 초 나에게서 집이란 곳은 남자에겐 휴식처이고 안식처 개념이지만 와이프에겐 오로지 가족만을 위한 공간 개념이었는지 이런 개념차이로 와이프와 상당히 많이 다투었다. 집으로 들어오면 쉬고 싶은데 이것저것 시켜 짜증이 날 정도라 어지간히도 다투고 평행선을 달렸다.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집으로 들어와 누구든 남자라면 거실의 소파에 누워 맘 편히 TV를 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이것저것도 싫으면 누워 잠을 자고 싶은데 와이프는 이런 나를 그냥 두지 않았다. 수시로 방청소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일을 시켰고 밥까지 하라고 시켰다. 심지어 어머니가 오랜만에 아들 부부 사는 것 좀 보겠노라고 시골에서 손수 재배한 농작물을 가지고 오신 후 홀로 다듬고 계시면  나를 불러내 함께하자고 요구하였다. 요즘 세상에 남녀구분이 어디 있으며 자기 역시 밖에서 일하고 들어오는 사람이라 밥순이가 아니니 가사분담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두 눈 부릅뜨고 거품을 양 입술에 머금고 악을 써대며 행여 소파에 누워있을라치면 그곳까지 다가와서 소리쳤으니 그런 와이프의 모습에 어머니조차도 기가질려 아무 소리도 못하셨다. 월급의 많고 적음은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런 오래된 지긋지긋한 다툼을 끝내기 위해 동네 호프집에서 마지막 대화가 시작되었고 주거니 받거니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붙여가며 자기 합리화를 주장하기도 하고 주변 주객들을 전혀 상관없이 큰소리치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두 시간 토론 끝에 결국 서로 합의를 하였다. 와이프가 밥 하면 내가 설거지를 하고 와이프가 빨래를 하면 내가 옥상에 올라가 빨래 말리기를 했고 그걸 걷는 것은 누구든 먼저 집에 온사람이 하기로 했다. 또 청소기를 돌리면 걸레질은 내가 하고 행여 주말에 남이섬이나 멀리 부산에 놀러라도 갈라치면 갈 때 운전은 내가 하고 올 때 운전은 와이프가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시댁에 용돈을 50만 원 주면 처가댁에도 50만 원을 줘야 했다. 우리는 영어로는 기브엔테크 국어로는 주고받기라는 이상한 계약을 한 후 맥주잔을 부딪치며 앞으로 원칙대로 행하기로 노가리 안주를 고추장에 찍어 씹어먹으며 다짐하였다. 어떤 예외도 없었다. 부득불 사정이 생기거나 몸이 아파 못하더라도 몸이 호전되거나 사정이 풀어진 다음엔 반드시 못한 만큼 해야 했다. 이런 생활이 익숙해지자 이것도 그런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거니 받거니 이만큼 하면 저만큼 하고 저만큼 하면 이만큼 하면서 각자 자기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아 서로 좋았다. 와이프가 행여 게을러서 빨래를 하지 않으면 내가 빨래를 말릴 일이 없어지고 와이프가 밥을 안 하면 내가 설거지 할 일이 없어서 좋았다. 외식은 순번에 따라 순서대로 계산을 했고 2차로 내가 술을 사면 와이프가 안주를 샀으며 정기적금이나 주택부금은 각자 알아서 했지만 둘만의 이익이나 가족의 이익엔 조금 손해 보더라도 기꺼이 힘을 합치기로 했다. 이러니 우리 부부는 서로 톱니바퀴 돌듯이 맞물려서 절대로 협조를 안 할 수가 없는 구조가 된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와이프의 이런 다짐이 얼마나 투철했는지 어쩌다 벽에 망치질이라도 해야 할 때 실수로 망치가 자기 손가락을 치는 한이 있을지언정 자기는 여자라 약해서 못한다는 소리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망치질이 끝나면 자신은 망치질을 했으니 나에게 어떻게 들어왔을지 모를 책상밑 꼽등이를 잡으라고 절규하며 큰소리치기도 하고 와이프가 똥을 싼 후 변기가 어쩌다 막히면 자신이 뚫어야 함에도 미리 선수 치듯 나를 불러 변기를 뚫어주면 두 가지를 해주겠다고 선심 쓰듯 재수 없게 말하기도 했다. 어쩌다 둘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데 내셔널 지오그래픽 동물 관련 프로에서 수사자의 모습이라도 나올라치면 그 수사자를 극도로 증오하기도 했다. 종일 필필 놀고 잠자다가 암사자가 힘들게 먹이를 잡을 때 어디서 나타나 뺏어먹는 파렴치한 모습에 치를 떨며 사자임에도 저런 개새끼라며 내가 들으라며 욕을 해댔다. 수사자가 섹스를 해주고 귀여운 새끼를 낳게 해 주는데 머가 불만이며 외부의 적들을 막아주기도 하니 그걸로 서로 도찐개찐이라며 우스개 소리를 넌지시 해보았지만 그럼 바로 이혼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나에게 했다.     

이런 기브엔테크도 예외가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육아와 섹스였다.     

매사 철두철미하고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정이나 인정 혹은 간지러운 사랑타령은 휴지통으로 버린 지 오래된 여자라도 태어난 아이 앞에선 한여름 얼음 녹듯이 사라져 버렸으니 언제나 기브엔테크를 나에게 주장한 와이프도 젖병하나도 관리 못하고 기저귀조차도 갈아주지 못하며 갓난아이의 울음패턴 인식이라든가 아이의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남편인 내가 못 미더운지 육아만큼은 100프로 자신이 챙겼다. 그나마 부탁이라곤 젖병이나 기저귀를 가져달라는 부탁이나 아이를 목욕시킬 때 욕조 위에 아이를 받쳐 들고 앉아있는 게 전부였는데 혹여 잘못하여 소독하지 않는 젖병을 가져다준다든지 아이를 잘못 들고 있으면 무지막지한 응징이 나에게 쏟아져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만큼은 어미의 새끼에 대한 본능이 가장 적나라하게 보였으니 굳이 동물의 왕국을 보지 않아도 될 판이다. 와이프의 직장 때문에 당분간 아이를 봐주기로 하고 집으로 오신 장모님마저 만에 하나 육아 관련 실수라도 할라치면 와이프에게 호되게 혼이 났으니 아이에 대한 집념이나 관심이 유달리 심한 자기 딸을 보며 혀를 끌끌찰 정도도 모자라 오히려 그런 이상한 딸과 함께 사는 나를 신통하다고 하실정도였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걸을 수 있게 되자 장모님은 미련 없이 뒤도 안 돌아보시고 장인어른이 홀로 계시는 시골집으로 바삐 돌아가셔 버렸다. 장모님이 집에 계셔서 좋았는데 바삐 가셔 버리니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해 죄송스럽기 짝이 없지만 와이프와 장모님도 서로 전화상으로 통화만 하고 끝난 것 같아 내가 특별히 그걸 언급한다든지 별다른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신혼 때엔 서로 간절히 원해서 이것저것 안 따지고 밤이고 낮이고 집이든 밖에서든 거실에서든 주방에서든 산속 텐트 속이든 자동차 안에서든 그 어느 곳에서든 할 수 있었고 내가 원하면 와이프는 내색 없이 기꺼이 응해주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긴 후 와이프가 육아 때문에 피곤한지 섹스하기를 극도로 거부했다. 한창 팔팔한  나로선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바로 옆에서 얇은 반바지에  나시 티셔츠하나 입고 누워있는 와이프의 탱탱한 뒤태를 보자면 미칠 지경이었다.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 와이프옆으로 다가가면 당장에 짜증을 냈다. 이것도 한두 번이지 더럽고 아니꼬운 것은 둘째치고 자존심이 상하기까지 하였다. 벌떡 일어나 장롱문을 열고 새로운 요와 이불을 들고 씩씩거리며 거실로 나오는데 와이프는 좀체 이런 나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람의 신경이 뇌에 의해 지배를 받고 그 뇌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는데 이것은 독립 개채로 의지와 상관없이 전봇대처럼 기다랗고 철근처럼 단단해지는데 그걸 쓰지 못하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부부의 행복이라든지 가장 함축된 사랑의 언어는 섹스라는데 그걸 못하게 되자 나 역시 신경이 날카로워져 갔다. 매사 짜증이 났고 왜 함께 사는지 이해를 못 할 정도라 와이프의 어떤 부탁이나 요구도 건성건성 하기 시작했다. 물론 직장 여자동료들이 육아나 어린아이 하나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조언을 나에게 해주었기에 일정 부분 이해는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른 여자들에게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밤늦게 술을 마시고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 늦게 거실에서 잠을 자는데 이상 야릇한 느낌이 들어 눈을 뜨자 와이프가 언제 누웠는지 옆에 있었다. 다소 의외라 깜짝 놀라는데 와이프는 지그시 웃으며 거실에서 심술부리며 잠자는 이런 내가 귀엽다는 듯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고선 가벼운 키스를 해주고 내 품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한순간 내 마음속 단단한 응어리가 와이프의 부드럽고 달콤한 입술 속에서 살살 녹아 없어져버리는데 사람의 마음은 조석변(朝夕變)이라 아침저녁으로 변한다는데 그 말이 맞는 듯하다.

아무튼 매사 여성으로서의 자존감과 자신감이 충만한 와이프의 남편 길들이기의 최고봉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 와이프는 진정 페미니스트의 끝판왕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