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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사람을 위한 존댓말

by 이매송이 Mar 05. 2025

엄마는 본인의 시어머니를 너무 싫어했기 때문에 연좌 아닌 연좌제로써 나 또한 친할머니를 죄인으로 몰았다. 손자만 용돈을 주는 할머니, 그러나 나를 우리 강아지라고 불러 주던 이도 할머니였다. 가끔 순천에내려가면 고깃국에 구운 고기에 가자미 구이에 셀 수 없이 많은 반찬을 차려 놓고, 밥솥에는 쑥떡을 쪄 놓아 밤새 설탕과 콩고물에 묻혀 먹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를 위한 연필, 공책 하나 사 준 적은 없다. 이것이 나의 어머니에게는 중요했으나, 정작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녀의 미움에 저당 잡힌 게 아닐까 깨달은 건 아주 긴 시간이 지난 뒤였다.


서울 깍쟁이인 어린 나는, 한옥식 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할머니 댁 여러 공간에 달방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몰랐다. 막내 동생은 연기를 전공했다. 입학하자마자 동생의 말투를 들은 교수는 사투리를 빼라고 요구했다. 아빠와 가장 가까웠으니 알게 모르게 닮아 버린 탓일 게다. 나의 청소년기에는 부의 부재가 컸기에 자매 셋 중 가장 영향을 덜 받았다. 그러나 가끔 밥을 양씬 먹고 왔지, 라는 문장에 물음표를 다는 친구들을 보며 나도 그에게서 아주 벗어날 수는 없구나 단념했다.


전라도 방언에는 아랫사람을 위한 존댓말이 있다.

~ 하셨는가, ~하소

예를 들면 ‘식사는 하셨는가, 식사 하소.’ 식이다.

아빠의 말투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다정함인 걸 알았다면 우리의 관계는 달라졌을까.


어느 날부터 수영장에서 돌아가신 할머니와 많이 아픈 큰 고모의 말투가 들렸다. 몇 주를 몰래 훔쳐 듣고는 오늘 용기 내어 물었다, 고향이 어디시냐고. 한 분은 부안, 한 분은 여수였다. 나의 시골이 순천이라고 하니 활짝 웃으시며 여러 말을 덧붙이셨다. 나는 전라도 말에 아랫사람을 위한 존댓말이 있어 좋다고 말했다. 두 분은 그게 정이라고 하셨다.


내가 사랑하는 건 막내 이모다. 보고 싶은 건 외할머니고, 가족이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면 나는 그 안에 둘을 넣을 것이다. 그러나 졸업작품 속 배경은 순천의 그 집이다. 서툰 사투리로 어렵게 마무리 한 소설이다. 친할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염을 할 때 본 그녀의 미소는 참 아름다웠다.


소안이라는 (소안은 순천시에서도 아주 작은 마을 이름이자, 아빠가 나고 자란 곳이다.) 사업장으로 사장님이 되고 싶었던 아버지, 뇌의 혈관이 3개나 터져 죽음을 반쯤 경험하고도 수술한 해에 고향에 혼자 내려간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 지긋지긋하다며 증오하다가도 그네들의 신앙심에 감동을 하는 알 수 없는 어머니.



싸울 때마다 핏줄을 운운하던 한 여자가 떠오른다. 쌍놈의 집안이라고 결국 누르지 말아야 할 버튼을 누른 그녀가 보인다. 그녀는 맞는다. 내가 맞았던 것처럼.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기억할 수도 잊어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생각을 한다. 오늘처럼 갑자기 떠오르는 문장을 잡고 놔 주지 않는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잘 흡수 되기를 바란다. 상처 주지 않으려 너무 오랜 시간 쓸 수 없었다. 이제 그 쪽은 바라 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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