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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누스토리 Nov 12. 2019

춘천의 명물 닭갈비는 갈비가 아니다.

닭갈비 요리는 닭, 야채, 양념의 삼박자가 과하지도 모자람이 있어서도 안된다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져야 최상의 맛을 자랑하는  닭갈비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닭갈비의 주요 재료는 닭의 갈비 부위라기보다는 날개와 다리 부위에 해당한다. 닭은 소나 돼지와 달리, 갈비 부위의 살이 거의 없다. 

중국의 삼국(三國) 시대, 유비가 촉을 차지하고 한중 땅을 얻기 위해 위나라의 조조와 한중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쟁은 장기전에 접어들었지만, 멀리서 원정을 온 조조 군은 공격도 수비도 버거운 상황에서 대치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는 철군을 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저녁식사로 조조가 닭갈비를 뜯으며 지금이 마치 계륵(鷄肋)과 같이 먹을 것은 없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지금의 내 처지와 같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특별히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까운 상황을 일컫는 말로 닭갈비가 사용되었다. 

또 다른 의미로 계륵은 몸이 마르고 약한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진서(晉書)》 <유령전(劉怜傳)>에 전해지는 고사로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인 유령(劉伶)이 술에 취해 어떤 사람에게 시비를 걸었다. 상대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먹을 휘두르며 덤벼들자, 유령은 이렇게 말했다. “워낙 닭의 갈비뼈 같은 빈약한 몸이라 당신 주먹을 받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소.(鷄肋, 足以安尊拳.)” 천연덕스러운 유령의 말에 상대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때리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닭갈비는 특히나 강원도 춘천지역을 나타내는 음식이기도 하는데, 춘천이 닭갈비의 원조가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춘천지역이 예전부터 양축업이 성행을 하였고, 도계장이 많은 탓도 있지만, 1960년대 춘천 중앙로에서 돼지 고깃집을 하던 김영석씨 부부가 어느 날 돼지고기가 다 떨어지자, 근처에서 급하게 사온 닭 두 마리를 돼지갈비처럼 손질을 하여 요리를 만들었다. 막상 닭고기를 돼지갈비처럼 넓게 펴서 구웠더니 색다른 맛이 났고, 이후 달콤한 양념에 재워두었다가 안주를 만들어 판매하여 크게 인기를 끌었다. 

다른 육류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강원도 지역에서 복무하던 군인들과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며 점차 유명세 퍼졌다. 초기에는 닭갈비 대신 닭불고기로 불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닭갈비는 고구마, 당근, 양배추, 파와 같은 야채와 함께 볶아 야채 닭볶음이 맞는 이름이지만 당시 갈비를 쉽게 먹지 못하는 갈비라는 이름을 붙여 더욱 인기를 끌었다. 고등어구이의 고갈비 역시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한동안 닭갈비는 서민 갈비, 대학생 갈비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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