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한테 하는 질문
문제가 뭔지 아직도 질문하는 중입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한국에서의 삶과 비교해 보면
이곳의 삶의 템포는 좋게 말해서 여유가 있는 편입니다.
한국에서는 분단위로 무언가 해치워야만 일이 쌓이지 않았습니다.
일이 많다 보니 저의 생각은 일을 해결하는데 사고가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든 것도 ‘자! 이 힘든 건 어떻게 처리해야 될까?’라고 생각하고 실행할 일이 있으면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고,
그래야지만 그다음걸 할 수 있었거든요.
당연히 제 감정들은 어떤지 생각하지 않게 되었죠. 일어나는 일들이 나에게 감정적으로 마음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는 깊이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이곳에 오게되다보니 정착과 적응이라는 과제를 두고 살다가 어느정도 이곳 삶에 대해서 큰 틀이 만들어지니
이제는 제 머릿속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쁘게 돌아갈 일이 별로 없어진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몸도 마음도 체력도 내 안의 에너지도 무겁게 끼그덕 대는 소리가 나는 것처럼 둔하고 쳐지게 되었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제가 시간이 남아돌고 몸이 편해서 잡생각이 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한국에서보다 이른 시간에 일과를 시작해야 되고 학원이나 다양한 교우관계가 형성되기 전이라 엄마가 오롯이 두 아이들의 일과를 책임져야 하고,
게다가 두찌는 아직 정규적인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다니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만 3시간짜리 아카데미 같은 걸 시작해서
대부분의 시간은 저와 함께 보내야 되서 나 혼자만 쓸수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객관적으로 한국에서보다는 신경 쓸 일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신경을 쓸 일이 적어지는 것.
힘을 써 유지해야 되는 모든 것들, 가족의 대소사, 잠깐이지만 첫째의 사교육루틴 부담의 해방, 회사일, 사람들과의 사회적인 관계들 이런 것에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니 당연히 신경을 쓸 일이 적어지겠죠.
그러나 슬프게도 힘든 것도 없어지지만 가장 소중한 것으로부터의 단절도 같이 오게 됩니다.
요즘처럼 영상통화도 인터넷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인스타그램으로 일상도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사실 그렇게 생각할 것도 없는데 말이죠.
하지만 왠지 저는 아이한테 신경 쓰는 부분 이외에 물리적으로 모든 것이 차단이 된 환경 같습니다.
마음속의 큰 공간이 텅 비어버렸고 그 부분이 생각보다 큰 것 같아서 무엇으로 메워야 되는 건지 잘 감이 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안나까레니나의 법칙에서 말하듯 행복한 가정의 이유는 대부분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의 이유는 수천수만 가지로 다양한 것처럼
내가 힘들다고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의 이유는 이름을 붙이기에 따라 더 수많은 이유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림을 그리고 일기 같은 글을 쓰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필터링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여기 펼쳐 놓는 것이 부끄럽고 부담스럽지만
이야기의 끝을 해피엔딩 새드엔딩 이렇게 정해져 있는 형식이 아닌
의식의 흐름대로 펼쳐보고 싶었습니다.
이 공허와 같은 마음속 공간에 좋은 것으로 잘 채우겠습니다 같은 뻔한 이야기는 안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쉽게 되지도 않는 것 같고요.)
대신 자리 잡고 있는 걱정, 불안을 바로 마주 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