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트라베이스 - 파트리크 쥐스킨트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존재감 없는 연주자의 독백을 그린 모노드라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전체 화음을 위해서 결코 튀어서는 안 되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저 오케스트라 속 이름 모를 한 구성원일 뿐이다. 그는 콘트라베이스와 자신의 처지를 사랑하면서도 지겨워한다.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잠깐만. 지금! 이 소리 들리지요? 이거요! 지금 이거요! 들리세요? 조금만 있으면 다시 나올 겁니다. 똑같은 마디거든요. 잠깐만요. 이거요! 들어셨어요! 베이스 소리 말입니다. 콘트라베이스요.
항상 몸이 아픈데도 아무도 돌봐주지도 않는다고 언제나 불평이 많으셨던 우리 친척 가운데 한 아저씨처럼 보입니다. 그런 요물 단지가 바로 이 콘트라베이스입니다.
콘트라베이스는 이제까지 발명된 악기 가운데 가장 못생기고, 거칠고, 우아하지 못한 악기입니다. 악기의 돌연변이지요.
저는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으로 공무원이 아니라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화풀이로 덩치가 최고로 크고, 손쉽게 쥐어지지 않으며, 독주가 안 되는 악기를 연주하기로 했습니다.
누구나 각자 자기 나름대로 서 있어야 할 위치가 있고, 또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왜 그 사람이 그 일을 하게 되었고 그가 왜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 따위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겁니다.
나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다.
그의 구구절절한 이야기에 밑바닥까지 공감한다. 실제로 내가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한다는 뜻은 아니고, 그와 처지가 똑같다는 이야기다.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는, 오직 다른 사람들을 빛내주기 위해 존재하는 무기력한 소시민.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는 게 전부인, 오늘도 내일도 크게 다를 것 없는 진부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지만, 이마저도 없으면 그나마 따박따박 나오던 쥐꼬리가 사라지게 되고, 그러면 먹고 살 방도가 없어지고, 또 다른 방법으로 먹고살 만한 다른 재주가 없어 그저 하루하루 맥주 한 캔을 마시며 퇴근 후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서글픈 샐러리맨. 나의 모습이다.
다들 그러고 산다든지, 매일매일이 지겨워 힘겹다든지, 탈출을 하고 싶다든지, 이런 뻔한 이야기는 이제 조금 지겹고.
나는 잘 살고 있지?
어떤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고, 깔깔대면서 오늘도 행복한 하루였다고 중얼거릴 수 있기를. 언제나, 늘 화려할 필요는 없지만, 힘들다고 후질그레 어깨를 축 늘어트리지는 않기. 억지로 괜찮아, 괜찮아 되뇌며 힘든 나를 매정하게 몰아치지 않기. 해질 녂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게 된다면 감사한 미소를 짓기. 한 우물을 파지 못하는 변덕을 자책하기보다는 순간순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충분히 몰입하기. 아무 할 일 없이 느릿느릿 공원을 산책하며 이런저런 되지도 않는 상상을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기. 퇴근길, 늘어나는 몸무게 걱정은 잠시 잊고 달콤한 머핀을 사 들고 가 먹으며 뒹굴뒹굴 책 읽기. 어떤 일이든, 잠을 줄이면서까지 아등바등 억척스럽게 매달리지 않기. 때론, 아무 생각 없이 마음껏 시간을 흘려보내기. 가끔은, 콘트라베이스 연주도 재미있다고 생각하기.
이 정도면, 잘 사는 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