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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노엘 May 23. 2018

나의 밤(夜)들

젊은 예술가에게 - 아트온페이퍼 편집부 엮음 



밤. 혼자임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는 시간. 사방에 어둠이 깔리고 세상이 고요해진다. 지지고 볶고 할퀴고 눈을 흘기고 상대를 짓밟으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낮과는 달리 밤에는 모든 것들이 조용한 잠에 빠진다. 소란스럽고 어지러웠던 것들이 차분해진다. 같은 장소지만 다른 장면이 연출되는 공간. 또 다른 우주. 


이 밤이 아쉬워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통약으로 달래며 쏟아지는 잠과 사투를 벌인다. 낮과는 다른, 밤의 나. 나 역시 또 다른 우주요, 또 다른 지구, 또 다른 역사다. 


예술가의 기질을 가졌으나 예술가의 재능까지는 미처 받아 챙기지 못하고 이 세상에 나온 나는 매일 밤 반쪽짜리 예술가의 영혼으로 흐느껴 운다. 나머지 반쪽의 결핍이 사무치게 서러워서. 세상이 규정한 안정감을 소망하나, 그 구속감은 견디지 못하는 모순된 두 개의 자아. 나는 밤 12시가 지나면 변신하는 신데렐라, 보름달이 뜨면 변하는 늑대인간, 해가 지면 괴물로 변신해야 하는 피오나 공주다.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모순된 두 개의 욕망이 내내 나를 괴롭힌다. 이 밤, 내 마음은 폭우처럼 휘몰아치며 사납게 으르렁거린다. 자꾸 사고를 일으킨다. 


그냥 작업을 하세요. 그리고 당신의 재능이 발견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엉뚱한 짓을 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익숙한 것과 과거에 유효했던 것을 넘어 아무 데도 갈 수 없습니다. 


당신의 작업을 위해 매일 시간을 내십시오.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게 도전하십시오. 


당신의 직감과 취향을 믿으십시오. 


작업실 안에서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을 찾아야 합니다. 위험을 무릅써야 합니다. 예술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도박입니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안전한 상상력은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예술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굉장한 고립을 요구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작업을 하는 동시에 동반자,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완전한 삶을 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인생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작업도 얼마든지 생활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해답은 작업입니다. 작업하는 것, 작업에 대해 생각하는 것. 


엄격하고 혹독하지만 정답인 조언들. 다른 방법은 없다. 잔인하다. 가혹한 정답의 무게가 힘겨운 나는 종종 '어느 날 덜컥'이라는 행운이 내 인생에 쏟아지는 상상을 해본다. 그냥 재미삼아 해봤는데 덜컥 어떤 시험에 붙어서 그 날부터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인생을 살게 됐다거나, 친구 따라 면접장에 갔다가 온 김에 오디션이나 보자며 면접을 봤는데 친구는 안 되고 자기만 됐다거나, 하는 이야기들. 나에게도 이런 이야기 하나쯤은 있어도 좋을 텐데. 무엇이든 노력하고 열심을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손에 쥘 수가 없었다, 내 인생에서는. 애를 써야 했고 연습을 해야 했고 암기해야 했고 밤을 지새워야 했다. 많은 밤들을. 현기증이 나고, 코피가 날 때까지, 잠이 부족해 하루 종일 머리가 띵할 때까지. 그렇게 내가 하얗게 지새웠던 나의 밤들. 그 밤이 내 힘의 원천이지만, 그래도 내 인생의 어느 밤은 뜨거운 코피 없이도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시간이고 싶다. 어떤 밤들은 좀 그래도 되지 않을까. 그래야 하지 않을까. 마법처럼. 


인내와 독기, 열정과 지독함. 내 트레이드 마크들. 지금도 그런가, 는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버리고 싶은, 내게 달린 표딱지들. 그러나 이것마저 버리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차마 선뜻 잘라버리지 못하는 단어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버리지 않았으나 이미 나에게는 없는 말들. 하는 수 없이 다시 주어와 내 꼬리에 달아야 할 것 같은 슬픈 나의 표식들. 수많은 밤을 함께 했던 나의 신념들. 그 밤들. 


밤은 분명 또 다른 지구요, 우주다. 나의 낮을 변화시키는 막강한 권력자. 그래서 이 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바보 같이,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또다시 쓴다. 나의 직감과 취향만을 붙들고. 되지 않는 것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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