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원 수업 중'한국의 고유 단어를 그대로 영어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지 질문을 받았다. 전혀 떠오르는 게 없었는데 유일하게 뇌리에 스친 단어, 바로 '김치'다. 발효 분야에서 유명한 책들을 읽어보면 목차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게다가 김치는 영국의 대형 체인점 마트뿐 아니라 작은 로컬 식료품점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한 번은 플리마켓을 구경하다가 김치 판매 부스가 있어 시식해 본 적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사람이 아닌 홍콩 분과 일본 분이 동업으로 하는 사업이었다. 현지화를 잘해서 많이 맵지 않았고, 비건 옵션도 가능했다.아쉬운 점은 사워크라우트처럼 굉장히 얇게 썰어놔 식감을 느끼기 어려웠다는 거다.
이렇게 타지에서 김치를 자주 접하다 보니 한국인인 내가 김치를 제대로 만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 이상하게 느껴졌다. 런던에서는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 김치를 팔고, 김치 만드는 법 요리 클래스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수년 전 김장할 때 옆에서 돕겠다고 무를 채 썰다가 손을 베여 뒷짐 지고 구경만 해야 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에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해서 직접 김치를 담가보자.' 다만 여긴 김치냉장고가 없으니 오래도록 숙성을 할 수 없어 1포기씩 그때그때 조금씩 해 먹기로 했다.
김치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일념으로, 엄마에게 영국 올 때 딴 건 몰라도 고춧가루와 새우젓은 꼭 챙겨 와 달라고 부탁했다. 고춧가루는 런던의 한인마트나 중국마트에서 구매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중국산이고 국산은 있더라도 훨씬 비싸다. 사실 고춧가루가 맛있으면 이미 김치의 맛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새우육젓이라니! 김치를 처음 담가봤는데도 맛있는 결과물이 나온 걸 보면, 좋은 재료를 쓰면 일단 반은 성공이다.
냉장고에 남아있는 배추 양이 얼마되지 않아 하는 김에 깍두기도 만들었다. 배추는 겉절이 마냥 한입 크기로, 무는 네모나게 썰어줬다. 고품질의 천일염으로 소금물을 만들어 절여주니 2시간 만에 잘 절여졌다. 염분을 조절하기 위해 물에 2번 정도 헹궈 물기를 빼주었다.
그 사이에 만든 김치 속이다. 시원한 맛에 먹으려고 채 썬 무를 잔뜩 넣었다. 파와 다진 마늘, 다진 양파, 다진 생강, 고춧가루, 새우젓, 액젓 대신 피시소스, 매실청 대신 수제 배청으로 만들었다. 조금씩 맛을 봐가며 재료들의 양을 조절했다. 마지막으로 찹쌀 풀을 쑬 수 없어서 밀가루 풀을 만들어 넣고 섞어줬다.
조물조물 버무려주니 김치 + 깍두기 뚝딱 완성! 랩을 덮어 상온에서 하루 정도 숙성시켰다.
다음날 아침 반나절 숙성 후 모습이다. 영국 오고 6개월 동안 제대로 된 한국김치를 먹어본 적이 없었고 사실 그다지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지도 않았었다. 이제와서 내가 만든 김치를 먹어보니 '아, 이맛이었지!' 싶다. 혀끝으로 강렬하게 전해져 오는 그리움이다.
만든 직후에는 매운맛이 꽤 강해서 혓바닥과 목구멍이 얼얼해지는 느낌이었다. 하루가 숙성되고 나서는 발효 과정에서 맛이 중화되어 먹기 딱 좋았다. 이 날 저녁으로는 처음 김치 담그기에 성공한 기념으로 된장을 풀어 삼겹살 수육을 끓였다. 밥상에 김치가 올라오니 여기가 바로 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