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휘휘 Aug 07. 2020

영원한 껍데기

복도 한 중간 계란이 깨졌다
노른자를 온전히 지켜낸 모양새
껍데기가 부서지고 깨져야 계란은
헤세가 말한 대로 세상으로 나온다
정작 그 말은 듣지 못하고 깨졌겠지만

방에 들어와 티비를 켰다 예능에는 외국인이 우리가 보지 않은 곳을 가보고 

뉴스에는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동네의 모르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죽을 만해서 죽은 사람은 없었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예능을 봤다
뉴스를 봤다
그저 지켜봐야 하는 것들
이방인의 여행길
미망인의 저승길

나가기 전 배고파 바나나를 집었다
벗겨 먹은 건 하얀데 버리는 건 노란
철저한 모순을 한 꺼풀씩 벗겨내 입에 털어 넣었다

문을 열었다
껍데기가 누군가의 발걸음에 차여 나뒹군다
노른자는 밟혔는지 흰자와 반쯤 섞여 울고 있다
흰자는 노른자한테 너 조금 탁한데 아니 이 거품은 뭐야 떠드는데
껍데기가 뭐라 말한다
넌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잖아
흰자는 뭐라 몇 마디 떠들다 거품을 물고선


꼬르륵


그대로 복도 바닥에 눌러앉아 죽어버렸다

학교 가는 길 병원
병원 귀퉁이의 장례식장 이름 모를 이가 죽어있다
살아있던 얼굴이 액자에 담겨있다
절을 하려다 영정이 떨어졌다
부서진 액자는 상관없다는 듯 미소 짓는 얼굴
액자 속 사람은 영원히

상주가 내게 누구냐 묻는다
김 씨가 이 씨의 얼굴에 절 두 번 하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
피붙이와 남이 만나는 명절마다 남이 해주는 의식 같은 일이라 말한다 

피붙이가 아닌 내가 당신의 곁에 머물다 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말한다
상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게 절을 하려 한다


맞절


나오는 길은 사방이 장례식장이다
김 씨는 이 씨에게 이 씨는 박 씨에게 절을 한다

부재중 전화가 알람처럼 울려댄다 필요할 때만 들러붙는 피붙이의 연락 

이번 기일에는 올 거냐는 문자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거스름

부서진 껍데기는 뉴스에 한 줄 성만 비추는
액자 없는 영정
영정의 주인 이 씨는 오늘도 이름 모를 김 씨에게
절을 받았다
살아있는 한 영정은 액자 속에 갇혀있을 

가여운 껍데기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에 별 하나 찍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