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첫사랑과 결혼했다. 짝사랑까지 포함시킨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고등학교 2학년이 막 되었을 때 나는 여의도의 모처에서 그와 딱 마주쳤다.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다가 누군가와 맞닥뜨린 후 서로 피해 간다는 게 대여섯 번쯤 상대와 똑같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금 짜증이 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가 들고 있던 바이올린 케이스였다.
나는 바이올린 음악을 좋아했다. 심장에 가는 실을 묶어서 잡아당기는 것 같은 음색은 매사에 대책 없이 밝고 장난기 가득한 나를 차분히 가라앉혀 주었다. 바이올린 음악을 들으면 이유 없이 눈물이 나오기도 했다. 나는 그런 음악을 듣고 있을 때의 내가 좋았다. 어딘가 어른스러워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고개를 들었다. S 예고의 교복을 입고 있던 그는 당시의 일반고등학교 남학생들보다 조금 긴 커트머리를 하고 있었다. 1초쯤 청신한 그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 그들 또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나는 다음 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그를 만났던 장소로 나갔다. 맞은편에서 그가 걸어왔다. 그런 식으로 일 년 가까이 거의 매주 그를 보았다. 하루는 일이 생겨서 한 시간 늦게 그곳으로 뛰어간 적이 있었다. 당연히 그를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늘 마주치던 상가 앞 시계 밑에 서 있는 그가 보였다. 돌아서서 숨을 고르고 되도록 천천히 그의 앞을 지나치고 싶었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후다닥 그의 앞을 지나갔다. 심장이 목까지 치밀어 오르고 맥박이 귀에서 뛰는 것 같았다.
한 번은 내가 시계 밑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날은 30분 늦게 그가 달려왔다. 나는 그의 모습을 확인한 후 곧바로 정류장에 들어오는 버스를 탔다. 엄마 심부름으로 이모네 집에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버스에는 설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 많았다. 겨우 의자 손잡이를 잡고 한두 정거장 후, 내가 선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울이었고 그를 기다리느라 한참을 밖에 서 있었던 나는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깜빡 잠이 들었다.
버스가 코너를 돌았다. 유리창에 머리를 콩 찌었다. 놀라서 눈을 떴다. 그가 내 옆에 서 있었다. 꿈이구나, 꿈에 그를 보다니 좋다, 생각하며 싱긋 웃었다. 현충원쯤에서 또다시 버스가 코너를 돌았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쳤다. 유리창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누군가의 손이 유리와 내 머리 사이에 있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갑자기 정신이 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실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바이올린 케이스가 보였다. 곧 내려야 할 정거장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가 왜 버스 안에 있는지 의아했다. 내려야 할 곳에서 두세 정거장을 지나치는 동안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잠든 척을 했다.
얼마 후 가방으로 나를 미는 것 같은 느낌에 놀라 살짝 눈을 떠보니 그는 온데간데없고 한 아주머니가 자신의 가방을 떠안기다시피 내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꿈이었을까.
창피했던 나는 한동안 그곳에 나가지 않았다. 한두 번 더 그를 보았는데 다가오려는 기미가 보이면 뛰다시피 그 자리를 벗어났다. 왜 그랬을까. 상상 속에서 완벽했던 그를 실제로 만나면 그의 목소리나 태도 같은 것이 내가 만든 환상을 퇴색시킬까 봐 두려웠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미숙한 아이였다. 곧 고 3이 되었고, 야자 때문에 더는 그곳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이삼 년 후, 한 번 더 그와 마주쳤다. 겨울이었고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밤이었다. 나는 지금의 남편과 세종문화회관 근처를 걷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바이올린 케이스를 어깨에 맨 남자와 그의 동행인 여자가 걸어왔다. 그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 눈길을 주지 않고 지나쳤다. 다섯 발자국, 아니 일곱 발자국쯤 지나 그를 돌아보았고 나를 돌아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뭐해?”
남편(그때는 남자친구)이 걸음이 부자연스러운 나의 팔을 잡을 때까지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는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고스란히 나이 들고 그만큼 역변한 나는 아직도 콘서트홀에 가면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를 살피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바이올린 음악을 좋아한다. 물론 비올라와 첼로도. 이제는 건반악기와 관악기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