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첫 명절이었다. 안방에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들, 고모들과 고모부들 그리고 아버지가 둘러앉아 있었다. 막 식사를 끝내고 상을 물린 엄마는 차와 다과를 들였다. 나도 엄마를 따라 센베이 과자가 든 접시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사과 윗부분을 칼로 톡 친 다음 껍질을 깎았다. 배와 단감은 미리 깎아서 잘라 두었지만 사과는 갈변해서 그 자리에서 했다.
“제가 생전 어머니 목소리를 녹음해 두었어요.”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어디 들어보자.” 막내 고모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내 방에서 피아노 건반처럼 누르는 녹음기를 꺼내왔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그 전해에 할아버지가 내 생일 선물로 사주신 것이었다. 아버지가 테이프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어른들은 모두 녹음기 주위로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김가루가 들어간 부채과자를 먹고 있었다. 테이프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말씀하.”
에서 녹음 버튼을 끼익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달려라 소년 캐산
날아라 소년 캐산
캐산 캐애애애산……”
당시 유행하던 만화의 주제가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가 나오는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가만, 이게 아닌가?”
아버지가 테이프를 꺼내 살펴보았다.
“맞는데…….”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르자, 캐산 노래가 계속되었고 뒤이어 바다의 왕자 마린보이의 주제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미쳐 방을 빠져나오지 못한 나는 사색이 되었다. 그 녹음은 동생들이 숨소리도 내지 못하게 조용히 시킨 후 내가 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속기를 쓸 수 있었다. 그 테이프에도 속기로 뭔가가 쓰여 있었지만 그런 게 여러 개였고, 공테이프가 필요했던 나는 그중 하나를 썼던 것이었다.
어른들은 할머니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기대하며 테이프가 다 돌아가도록 만화 주제가를 들었다. 나는 노래가 나오는 동안 무릎을 꿇고 벽 쪽으로 돌아앉아 훌쩍훌쩍 울었다. 작은할아버지가 괜찮다고 말하며 나를 다독였고, 그 소리에 나는 더 큰소리로 울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등 뒤에서는 만화 주제가가 계속 흘러나왔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더 이상 만화 주제가를 녹음하지 않았고 따라 부르지도 않았다. ……오롯이 책임져야 할 마음이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그 외에도 실수는 많았고, 종종 엉뚱한 일을 만들어서 난감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를 도와준 것은 캐산이나 마린보이, 아톰, 슈퍼맨이 아니었다. 인생이라는 자동차에 초보운전 딱지를 붙인 채, 깜빡이를 켜고 계속 직진하는 나에게 잠깐씩이나마 자기 앞자리를 내어준 사람들이었다. 내가 그들 앞에서 얼마나 답답하게 굴지 모르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나는 그들의 넓고 평평한 마음을 징검다리 삼아 지금도 바다 위를 걷고 있다. 어디선가 바다의 왕자 마린보이가 잘도 싸우고 있는 바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