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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by 김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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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지끈 지끈하고 온몸이 아팠다. 다행히 열은 감염병을 의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병원에 가니 편도선이 부었단다. 마스크를 쓴 후로 편도선이 부은 건 오랜만이었다. 몸살도 있었다. 그래도 감기라는 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약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봉시를 먹고 약을 먹고 비타민C도 먹고 쌍화탕도 먹었다. 약기운에 졸음이 몰려왔지만 제대로 잠이 오지는 않아서 좋아하는 미드 엘리멘트리를 봤다.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셔츠의 단추를 목까지 채운 셜록이 돌아다니고, 똘망똘망하고 독립적인 조안이 불편해 보이는 구두를 신고 잘도 걸어 다녔다. 보는 중간에 잠깐씩 잠을 잤는지, 눈을 뜨면 어느새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 있곤 했다. 에잇, 그냥 잠이나 자자, 하고 드라마를 끄면 정신이 말짱해져서 눈만 끔벅이다가 다시 드라마를 틀었다.

어렸을 때도 편도선이 잘 부었다. 그런 날을 학교에 가지 않았다. 엄마는 사과를 반으로 잘라 숟가락으로 긁어 조금씩 입에 넣어주었다. 맏이였던 나는 아플 때만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 편도선에는 아이스크림이 좋다고 해서 열이 내리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했다. 방학도 아닌데, 환한 대낮에 어깨에 이불을 두르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요 밑에 숨겨둔 만화책을 넘기고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어느덧 약기운에 취해 잠이 들었다가 어스름할 때 깨어나 저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쩐지 시간을 번 것 같았다. 느긋하고 나른한 기분으로 흠흠 소리를 내어 보면 목도 많이 나아 있었다. 내가 깬 기척에 방문을 연 엄마가 목이 좀 나아졌는지 물으면 아직 아파, 하고 엄살을 부렸다.

이제 그런 일은 꿈속에서도 재현되지 않는다. 자는 둥 마는 둥 셜록과 조안을 따라다니다가 나 혼자 길을 잃고 낯선 거리를 헤맸다. 이국적인 거리를 헤매다가 지하철역에서 나오면 곧장 익숙한 동네였다.

로또에 당첨되면 뭘 할 거야? 누군가 물었다.

겨울엔 따뜻한 나라에서 살다 오기도 하고, 해외든 국내든 몇 개월에서 일 년씩 살고 싶은 데서 살아보고 싶어. 내가 대답했다.

그래도 돈이 남으면?

돈이 남아?

돈이 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누군가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은 좀 어때?”

어느새 퇴근한 남편이 물었다.

“약 먹고 쉬었더니 괜찮아.”

내가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며 말했다. 죽을 사 왔다는 말에 나가보니 대기업 제품이 종류별로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원하는 맛으로 먹으라고.”

남편이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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