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부드러운
1. 어제 치과를 갔다. 두어달 만에 갔다. 원래는 바로 갔어야 했다. 일 때문에 한번 미뤘다가, 계속 미뤘다. 시간을 내면 낼 수 있었는데도… 치과 의자에 눕자 마자 원장님이 왜 바로 안왔냐며 쿠사리 줬다. 불편하지만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로 가만히 천장만 봤다. 물론 초록색 천이 덮혀 있었고…
2. 한 삼십분 넘게 치료를 받는데, 대학생 때 생각이 났다. 한창 돈이 없을 때였다. 이가 너무 아팠는데 치과 갈 생각을 못했다. 생활비도 학자금 대출 받고, 부족한 건 과외로 충당하던 때였다. 치과갈 돈을 가족에게 요구하지도 못했다. 치아가 아플 때까지 관리를 제대로 못한게 수치스러웠다. (누구에게? 엄마에게? 의사에게?) 너무 아프면 진통제를 서너개씩 먹고 수건을 물고 잤다. 가끔씩 이빨이 숭숭 빠지는 꿈을 꿨다. 아침에 일어나면 치아가 제대로 있는지 혀로 훑었다. 더이상 미룰 수 없을 때 치과를 갔다.
3.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왜 이 기억이 생각났을까? 단순히 치과라는 장소 때문은 아니다. 작년에도 꾸준히 치과를 갔다. 잠들어 있던 기억을 깨운 건 ‘오랜만에 치과를 간 나’ 때문일 것이다. 정확히는 ‘오랜만에 치과를 가서 느낀 수치심’ 때문이다. 그 부끄러움이 어떤 기억을 끌어올렸다.
4. 이반지하 유튜브에 지난 서울국제도서전 북토크 영상이 올라온 걸 봤다. Q&A 시간에 누군가 수치심을 어떻게 다루는지 물었다. 이반지하 썜은 우선 수치심을 구분하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이 사회가 나에게 던져주려고 하는 수치심인지, 내가 마땅히 느껴야 하는 수치심인지, 그걸 정면으로 보고 파고들어야 한다고 했다. 유용하며, 어려운 일이다. 내가 느낀 수치심은 자기 관리에 관한 것인가? 가난에 대한 것인가? 어디까지가 내몫(내탓)인가?
5. 주말엔 로베르트 발저의 <연필로 쓴 작은 글씨>를 읽었다. 카프카와 벤야민에게 찬사를 받던 발저는 고독과 불안, 망상으로 고통받다가 1929년 정신요양원에 입원했다. <연필로 쓴 작은 글씨>는 요양원에 들어가 쓴, 연필로 쓴 원고들을 정리해 해독한 책이다. 본인의 의지와 달리 정신분열증이란 병명으로 요양원에 들어간 발저의 글은 계속 봐도 잘 이해가 안됐다.
6. 그러다 마주한 이 문장을 오래 읽었다.
“기억은 소진되는 것.
결국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누구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오로지 저절로
생겨나, 시간과 함께 커졌다가 사라지고 마는구나”
7.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기억은 멋대로 찾아오고 또 혼자 종종 사라진다. 허탈하지만 위로도 된다. 이 문장을 같이 읽는다면.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부드러운 불행이 희미해져가는구나”
나를 힘들게하는 기억도 결국엔 소진될 것이다.
8. 최근에 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녔다. 대체로 기억이 소진된 여자들이다. 또 다수는 조현병, 우울증 등 정신질환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기억)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 주저되는 순간이 많았다. 나의 질문이 그들의 잊혀진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다시 꺼내고 있지는 않는가. 내 질문이 그걸 감수할 가치가 있는가. 여자들의 기억은 이름이 붙어본 적 없는 불행이었다. 그러나 부드럽지는 않았다. 그들의 수치심은 어디까지가 그들 몫인가?
9. 용기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수치심을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내가 질문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홀린듯 여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불행에 이름을 붙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언젠가 글을 쓰고 싶어 했다. 족히 백 개는 되는 볼펜과 수십개의 노트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써보진 않았다고 했다. 잠깐 글을 써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는 주저없이 글을 써내려갔다. 나는 그 글을 두고두고 읽었다.
(24.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