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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Feb 15. 2024

거장의 마지막 작품은 미완성이다

류이치 사카모토 : 오퍼스 

1. 금요일 반차내고 코로나 이후 처음 목욕탕 갔다. 진짜 집중해서 두 시간이나 때 밀었다. (이정이 준 사봉 스크럽 진심 좋다.)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회전 초밥집 가서 생맥주 한잔까지 마시니 정말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대로 집에 가기 아쉬워 근처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확인했다. 30분 뒤에 상영되는 영화 하나. <류이치 사카모토 : 오퍼스>

2. 시간도 너무 길지 않고 (약 100분), 평점도 좋고, 류이치 사카모토가 누군진 알고(?) 있으니… 끌렸다. 볼까 고민하는 와중에 두 명이 보라고 추천했다. 친구가 말해준 덕에, 그제서야 이 영화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생전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콘서트 영상이란 걸 알게됐다. ‘가서 잘게 뻔한데,,,’ 그래도 (혹은 그래서) 갔다. 목욕하고 맥주 한잔 하고 노곤노곤한 상태에 류이치 사카모토 연주 들으면서 잔다고? 완전 사치스러운 호사다!

3. 직접 보니 완전 연주 실황은 아니고 관객 없이 스튜디오에서 녹화한 연주 영상이다. 영화엔 그의 음악 인생을 아우르는 20곡의 연주가 등장한다. 오퍼스(opus)는 작품이란 뜻이라고 한다.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완벽한 연주로 기록하고 싶었던 거장의 마지막 유언같은 영상이랄까? 영화는 시종일관 그의 열중하는 표정과 손가락 하나하나를 쫓는다. 조금 졸았다(ㅋㅋ). 10분 정도. 정말이지 호사스럽다.

4. 피아노에 대해 거의 모른다. 그런 내가 처음 내 돈주고 독주회를 보러간 경험이 있다. 2019년에 포르투갈에 갔을 때다. 사실 연주가 목적은 아니었고, 건축 기행을 하던 터라 렘 쿨하스의 ‘카사 다 무지카(casa da musika)를 보는게 메인이었다. 그런데 공연장 답사라면 당연히 공연을 경험해봐야 그 진가를 아니까. 그날 Vadym Kholodenko의 베토벤과 라흐마니노프, 알렉산드르 스크랴빈의 곡을 들었다.

5. 맨 앞자리에서 땀 흘리는 피아니스트를 바라보며 느낀 것은… 피아노 연주, 어떤 종류의 예술적 행위는 굉장한 육체 노동이라는 단순한 진실이었다. 그날 적은 일기의 일부를 발췌하자면… 


(기시 마사히코를 인용하며) 육체 노동은 하는 도중에 “덥다, 힘들다, 아프다, 춥다”같은 신체적인 감각을 계속 느끼는 작업이다. 고로 육체노동이란 몸을 판다기 보단 감각을 파는 행위라는 것이다. 눈을 감고 들으면 아름다운 선율만 들리지만, 눈을 뜨면 연주를 위해 고통스럽게 때로는 빙의한 듯이 집중한 연주자의 얼굴과 흘리는 땀까지 뚜렷히 보인다.


6. 영화에서도 류이치 사카모토의 ‘육체 노동’을 느낄 수 있다. 그는 힘들면 잠깐 쉬어가며. “무지 애쓰고 있어요”. 눈을 감으면 그저 아름답지만, 눈을 뜨면 화면 가득히 그의 표정이 담긴다. 때로는 일그러져 있고, 때로는 연주에 만족스러운듯이 웃는다. 다만 영화는 공연과 달리 육체노동이라는 사실이 관객에게 와닿기 까지의 시차가 존재한다. 대신 영화라 더 인지하게 되는 것도 있다. 저 사람이 저 영상을 ‘죽기 전에 (굳이 굳이) 찍었다’는 사실이다.

7. 영화관에서 1분도 안되서 눈물을 터트린 영화가 딱 두 개 있다. 하나는 오퍼스. 하나는 라라랜드. 오퍼스는 영화 시작부터 류이치 사카모토 뒷모습과 연주 장면이 보인다. 흑백의 화면. 하얀 머리. 검은 피아노. 늙은 거장. 이제 존재하지 않는 신체. 손가락. 그의 의도. 그런 것들 때문에. 라라랜드는 어떤가? 반짝이는 대낮. 다채로운 색상. 로스엔젤레스의 고속도로. 꿈을 얘기하는 젊은이들. 그런 것이 찬란하고 허무해서 울었다. 거장은 죽기전 마지막을 연주하지만 젊은이들에겐 또다른 태양(another day of sun)이 뜬다. 죽음과 삶에 대한 대조적인 영화. 두 영화 모두 음악으로 시작했기에 그런 감정적 고조가 가능했을 것이다. 음악의 힘, 예술의 힘이겠지.

8. 두달 전 쯤 취재차 <공포의 외인구단>을 그린 이현세 화백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 그는 44년간 창작한 만화를 AI에게 학습시켜 리메이크작을 만들고 있었다. 화백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이현세 AI가 세상과 공명하는 것을 꿈꾼다고 했다. 그런 그도 작업할 땐 여전히 직접 연필로 만화를 그렸다. 얼마 전 본 박서보 화백의 다큐멘터리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왔다. 지난 해 향년 92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마지막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어쩔땐 손이 되게 떨려요. 떠는 대로 그대로 그리니까 상관없어요. 그걸 감추려고 하면 오히려 더 이상해지는거야”


9. “거장의 마지막 작품은 미완성이다. 그들은 죽기 직전까지 쓰기 때문이다.” 어디서 본 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이 문장이 떠올랐다. (위화의 책이었던 것 같다.) 거장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작업할 뿐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으니까.


(24.1.7)



카사 다 무지카에서 본 Vadym Kholodenko
이현세 화백
故 박서보 화백
왜 거장은 다 남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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