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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Feb 20. 2024

인생이 쓰다고 인생을 안 사느냐!

1월 25일의 일기

(1월 25일에 쓴 일기. 그날 하루를 복기하며 올린다)



1.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과도한 책임. 결과물에 대한 걱정. 어긋하는 의견들. 모든 걸 조율해야 하는 역할...


2. 오늘도 힘든 일이 많았다. 새로운 연출을 시도해보고 싶은 나와 기존 관성대로 움직이려는 (그건 절대 나쁜게 아니다. 효율적 태도다) 하는 사람들. 계속 설득하는 나를 보다가 왜 나만 이렇게 노력하지 싶어서 짜증나다가도.. 어제 내가 쓴 메모를 들춰봤다. <설득할 수 있다는 건 좋은거야. 그럴 기회, 그럴 시간, 그럴 능력이 내게 있다는 것은.>


3. 문제는 대체로 해결된다. 그 다음엔 또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해결될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이번 한 주에 너무 무너질 필요도, 들뜰 필요도 없다. ‘왜 나만 설득해? 나만 노력해?’라는 질문은 불필요하다. 하고 싶은걸 하는 기쁨을 벌써 잊은 자의 투덜거림이다. 나와 타인의 온도가 다른 것도 이해해야 한다. 내가 정한 아이템을 하는 나와 팀원들의 열의와 의지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 하고 싶은걸 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그런 태도가 과도한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낮추진 않는다. 그래서 점심시간 때 마다 혼자 밖으로 나갔다. 잠깐이라도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짧지만 질 좋은 휴식을 위해. 점심에 와인 한잔을 3,900원에 파는 곳에 가서 혼밥을 하고, 회사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을 길목을 골라 산책을 했다. 이후 스타벅스에 가서 책을 읽는다. 아침에 노조 사무실에서 빌려온 책이다. <키키 키린, 그녀가 남긴 120가지의 말>


5.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깜짝.



“행복이란 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는 것!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나 시시해보이는 인생도,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 거기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키키키린 그녀가 남긴 120가지의 말


6. 그러고보면 오늘 얼마나 많은 행복이 도처에 있었고, 내가 그걸 어떻게 발견해왔나. 제때에 제대로된 책을 빌려 제게 맞는 문장을 발견한 것. 저녁엔 혼자 먹기 최고인 맛집을 새로 발견한 것. 맛있는 디저트를 사서 집으로 돌아와 와인과 함께 마시며 책을 마저 읽은 것. 고등학교 때 선생님에게 연락이 온 것. 그분이 멋진 책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 선생님의 책을 사서 내가 아는 또 멋진 분에게 선물을 한 것. 후배가 먼저 연락을 해서 취재 관련한 도움을 주고 싶다고 이것 저것 정보를 알려준 것.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 좋은 일들이 주변에 있다.


7. 오늘 점심 시간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하는 <대사 극장>이란 전시도 짬을 내서 보러갔다. 한국 영화의 주옥같은 명 대사들을 복기할 수 있는 전시였다. 전시가 끝날 때는 대사가 쓰여진 엽서 하나를 골라 가져갈 수 있다. 내가 고른 엽서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 나온 대사였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해.”


8. 내가 자랑스러운 순간은 이럴 때다. 애써서 하루를 살고, 애써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모습. 오늘의 스트레스와 번뇌도 다 지나갈 것이다. 인생은 길다. 그렇다고 오늘의 행복까지 놓쳐선 안된다. 키키키린의 말들을 열심히 적어본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지 않으면 삶 속에서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가진 걸로 어떻게든 해나가는 거죠”, “심각해질 때도 있지만 놀기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난 그렇게 강하지도, 약하지도, 위대하지도, 쓸모없지도 않으니까요”


9. <대사 극장> 전시에서 처음 알게 된 영화가 있었다.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이다. 당대 스타 배우 신성일이 나온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일요일 아침에 시작한 영화는 가난한 청년이 친구에게 훔친 돈으로 애인을 병원으로 데려가 낙태수술을 시키는 일요일 밤에 끝난다.] 거기서 내가 발견한, 바로 꽂혀버린 대사가 있다.


“... 이제 곧 날이 밝겠지, 새벽이 오겠지, 거리로 나갈까? 사람들을 만날까? 커피를 마실까? 아니 이발관을 가야지, 머리부터 깎아야지, 머리부터 깎아야지”


 전시 소개문의 말처럼 놀랍도록 ‘아름답고 무기력한’ 대사다. 1968년의 대사지만 2024년에도 어떤 위화감 없다.


10. 왜 이 대사에 꽂혔을까? 가끔은 행복하기 위해 애쓰는 나의 고군분투가 때로는 애잔하고 애처롭게 보일 때도 있다. 현재가 힘드니 계속 앞을 보고 이걸 해야지, 저걸 해야지, 하는 분주한 마음이. 하지만 그 애잔한 대상이 당사자인 나인 이상, 내버려둘 수도 없다. 힘들어도, 행복을 찾으며, 그런 내가 애잔하더라도, 무릅쓰지 않고....


11. 전시에서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대사. <두근두근 내인생(2014)>의 대사다.



“인생이 쓰다고 인생을 안 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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