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얘기, 우정 얘기, 수상 소감의 공통점
사랑 얘기, 우정 얘기, 수상 소감의 공통점이 있다. ‘그거 너나 좋지…’
수상소감에 대해 말하자면, 폐쇄적이라 대체로 지루하다. 수상자는 자신에게 감사한 사람이나 사건을 호명한다. 소감의 청자는 분명하고, 확실히 나는 제외되어 있는 듯 하다. (한때 취미는 해외 시상식 수상소감을 보는 거였다. 대체로 꽁트거나 정치적 발언을 하는 소감들이었다. 적어도 그 스피치의 청자엔 내가 있었다. 하지만 말하는 자아가 너무 강하면 안보고 싶어진다. 솔직히 조현철 수상소감도 영상 끝까지 못봤다… ‘정희진의 공부’ 팟캐스트에 조현철 감독이 출연했을때 오디오로만 들려준적 있었는데, 그때 처음 풀버전을 ‘들었다’)
오래 기억에 남는 수상소감이 있다. 일본의 철학자이자 평론가인 아즈마 히로키가 <퀸텀 패밀리즈>라는 소설로 미시마 유키오 상을 받았을 때 한 소감이다. 수상 소감은 그의 책 <느슨하게 철학하기>에 번역되어 있어서 읽을 수 있었다. 아즈마 히로키의 소상소감이 내게 다르게 와닿았던 것은, 자신에게 충실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엔 수상소감을 보는 사람들, 말하자면 대중적인 성공을 한 사람들을 지켜보는 범인들의 혼탁한 감정(=‘…어쨌든 님은 성공했잖아요’)이 녹아져 있다. ‘아무튼 님은 승승장구 하고 있잖아요. 이 상 받으면 더 승승장구 할거잖아요.’ 근데 아즈마 히로키는 자신도 그걸 알고, 공포를 느낀다. 왜 상을 받은 현실과 받지 않은 현실은 다를까. 왜 현실은 하나뿐일까. 누군가는 겨우 문학상에 불과하다고 말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그도 우리도 안다.
"사람들은 그냥 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 사실이다. 동시에 별생각없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인생이 단 한번뿐이라는 것,
정말 많은 일이 우연히 정해진다는 것을 잊고 있다.
물론 이 상을 수상하든 말든
<퀸텀패밀리즈>의 가치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내 인생은 바뀐다.
수상함으로써 비로소 알게되는 것이 있고,
알수 없게되는 것도 있다.
어느쪽이 나은지는 모른다.
만약 11년 전에 <존재론적 우편적>이
미시마 유키오 상을 수상했다면
그 후의 내 활동은 전혀 달렸을 것이고,
아마도 00년대 비평을 대표하는
아즈마 히로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퀸텀>이 상을 수상함으로써
분명히 나에겐 하나의 가능성,
하나의 미래는 소멸했다.
이미 확정된 사실이다. 결코 돌이킬 수 없다.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또 하나의 나’를 계속 생각하는 일 뿐이다.
앞으로도 또 하나의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소설을 쓰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미시마 유키오 상을 받지 않은 지금
나를 축복해주는 말을 접하지 않은
또다른 나를 떠올린다.
또 하나의 내가 겪을 피로와 체념과 실망을,
그리고 그 속에서 세월을 보내
40대가 될 또하나의 내 40대를.
오히려 나는 그 내가 사는 인생이야말로
진짜 인생이엇을거라고 믿는다."
- 아즈마 히로키, <느슨하게 철학하기>
아즈마 히로키는 상을 수상함으로써 상을 수상하지 않은 세상, 하나의 미래가 소멸함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 세상의 나’를 계속 생각하기로 한다. 그 세상에서 내가 겪을 피로와 체념과 실망을 상상하고, 오히려 그게 진짜 인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그 인생의 내가 납득할만한 작업을 계속 하는 것이 이 세상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마치 성공한 아즈마 히로키가 성공하지 않은 나에게 전해주는 말 같다. 근데 어쩌면... 현재로서는 이게 그나마 나의 성공한 버전일 수도 있다(;;) 나도 내가 이룬 작은 성공들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세계의 나를 생각한다. 그 세계의 내가 납득할만한 삶을 살고있나?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2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