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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멍난 숟가락 Nov 24. 2017

과자에 대한 예의

눅지마, 포카칩!

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친구를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내 옆에 한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가 이제 막 뜯은 과자 한 봉지를 먹고 있었다. 나는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하나만”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지만, 그렇다. 나는 종종 먹는 것 앞에서 이성을 잃고 만다) 그리고 그 순진무구한 꼬마는 정말로 과자 하나를 내 손 위에 올려주었다. (아마 “세 개만” 이라고 말했다면, 세 개를 주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 같았으면 아들 뻘 되는 아이의 간식이나 빼앗아 먹는 파렴치한 여고생 이야기를 꺼내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따로 있다. 과자는 뜯는 즉시, 될 수 있으면 빠른 시간 안에 먹어야 그 특유의 바삭바삭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이다!!!! (강력히 주장하고 싶을 땐 느낌표를 여러 개 찍게 된다.) 그것이 바로, 과자에 대한 예의다. (그러니까 그 꼬마가 과자를 나와 좀 더 나누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오늘 저녁은 고구마와 과일로 간단히 요기만 하려고 했으나, 머릿속에는 먹다 남아서 비닐봉지에 싸둔 오징어집+포카칩, 그리고 카스가 자리를 잡아버리고 말았다. 맥주와 과자의 짭짤+시원, 시원+짭짤의 조합을 나는 사랑한다. 결국 하던 일을 급히 정리하고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플레이 시킨 뒤, 카스와 과자봉지를 가지고 왔다. 마실 때마다 딱 한 번뿐인, 맥주의 첫 모금을 찐하게 느끼고 난 후 (벌컥벌컥 많이 마셨다는 말이다) 오징어집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릴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때를 놓쳤구나!’      


정확히 5일 만에 과자는 비닐봉지의 어느 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공기와 접촉해, 눅눅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포카칩은 사정이 더 나빴다. 5일 전에는, “누구든 덤벼만 보라지!” 하는 혈기왕성한 청소년이었다면, 그새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라며 세상을 다 알아버린 듯이 구는 중년이 되어버렸다. 이제와 진공상태로 만들어준다고 해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카스 캔을 “톡” 딸 때까지 만해도, TV광고 속에서 맥주를 뒤집어 쓴 채 춤을 추는 여주인공 같았던 내 마음 역시 덩달아 시들해졌다. 나는 그저 잔반처리반의 심정이 되어, 과자와 맥주를 번갈아 마셨다. 그러나,

     

그 와중에 내 신경은, 찬장 안에 아직 미개봉 상태로 있는 “포카칩” 한봉지로 뻗쳤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안 먹으면 안 먹었지, 한 번 먹으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왕 먹은 김에, 제대로 한 번 먹어보자!” 그래서, 포카칩을 뜯었느냐! 그렇다. 뜯었다. 그러나 당장은 아니었다. 대략 30분 후, 가족들이 다 모였을 때 모두의 동의를 얻어 개봉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 엄마, 아빠, 동생. 네 명이 한줌씩만 먹어도 금방 끝날 분량인데도, 웬일인지 나는 속도를 내고 있었다. 포카칩의 바삭함을 지켜주겠다는 결의로. 먹는 와중에 모두에게 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삭바삭. 과자 먹는 소리에 맞춰 누군가 랩을 했다면, 워낙 속사포라서 가사를 알아듣기 힘들었을 것이다. 과자에 대한 내 마음은 언제나 똑같다. 과자는 남기지 말고, 다같이 나눠먹는 게 제 맛이다.            


              

여기서 잠깐! 이렇게 글을 끝맺으려는데 문득 떠오르는 어릴 적 기억이 하나 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동생이 초등학교 2학년, 언니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기억 속에서 나는 우리 자매들과 거실에 앉아 있다. 근데 어쩐 일인지 우리 셋은 조금씩 멀찍이 떨어져 자리를 잡고 있다. 세자매가 세모꼴로 앉아 있는 것이다. 손에는 치토스를 한봉지씩 들고 있다. 치토스는 빨간 봉지에 든 매콤한 맛과 갈색 봉지에 든 바비큐맛 이렇게 두 가지 맛이 있었는데, 누가 어떤 맛을 들고 있었는지까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분명 빨간봉지도 있었고, 갈색봉지도 있었다. 그러나 과자 한 봉지를 다 비울 때까지 우리는 세모꼴 대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으며, “네 맛은 어때?” “하나만 바꿔먹어볼까?” 같은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을 끝까지 오롯이 책임졌다. 이건 과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과자가 최상의 상태로 바삭바삭할 때, 양념 하나 남기지 않고 싹쓸이 했다.(봉지에 남아있는 양념을 손가락으로 훑어서 쪽!)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과자가 눅눅해지기 전에 다 먹는 것! 이것이 과자에 대한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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