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마음과 마음을 들여다보다

너와 나를 이해하고픈 속삭임

by 하이민

소통 방법


언어라는 수단으로 개인의 의식을 전달하는 과정은 놀랍다. 물론 지역, 세대, 사람별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에 온전한 의미의 전달은 힘들지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확실한 감응 방법인 것은 분명하다.


어적 소통은 소리와 문자로 표출되어 밖으로 나온다. 둘 다 효과적인 의사표현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흩어져버리는 말보다는 종이에 새겨 넣으며 각인되는 글을 선호한다. 말 또한 녹음 등의 방법을 사용해 특정 시간을 가둘 수 있지만 공기의 파열음을 수없이 반복해도 그 음성이 내 것이라는 충족감이 들지는 않는다.


손에 힘을 주곤 꾹꾹 눌러쓰거나 키보드를 두드려 입력하는 문자 하나하나가 주는 진중함의 무게가 조금 더 와닿는다. 글을 남길 때면 오롯이 나만의 것을 가진다는 생각에 결핍되었던 소유욕이 채워진다.




오뚝이 정신


누구나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일이 한 가지씩은 있기 마련이다. 내 경우엔 글쓰기가 바로 그것인데, 재능의 한계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마음이 상하면서도 글 자체를 놓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일종의 오뚝이 정신이라 할 수 있는 마음이다. 나는 이것이 간절함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쉽게 포기할 수 없기에 간절하고, 놓을 수 없기에 도전한다. 포기하는 순간 그걸로 모든 게 끝이라는 걸 알고 있다. 지금까지 쌓아온 노력과 마음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거다.


그게 아깝지 않을 정도로 부딪혀보고 가능성이 없다 납득한 사람은 오히려 미련을 두지 않고 다른 길을 찾아간다.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과 가능성을 놓지 못하는, 아니 놓지 않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시도한다. 둘 중 무엇이 더 좋은지는 알 수 없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자신을 더 꽃 피울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아가는 것과, 미련할 정도로 한 가지 길에만 몰두하는 것. 어떤 길을 선택하든 모두 다 의미가 있고 가치 있는 삶일 것이다.




이해와 존중의 문제


사소하게 부딪치는 일들로 새삼 내가 나라는 사람 그 자체로 이해받고, 또 존중받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습관, 버릇 또는 취향이란 것들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욱 확고해지기 마련이다. 그러한 개인의 호불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련의 과정을 배려라 부른다. 사회에서 맺는 다양한 인간관계는 의외로 이런 배려의 폭이 크다. 사회생활을 통해 만난 사람이기에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상처 입은 마음을 애써 보듬으며 견뎌야 하는 관계는 가족일 때가 많다.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이니까’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감정을 통제당하고 상대방에 대한 몰이해가 당연시된다. 아무리 나 자체를 봐 달라 외쳐 봐도 돌아오는 건 가족 구성원으로서 강제로 뒤집어씌우는 의미 없는 역할뿐이다. 나는 나 자체가 무시당함에 분노한다. 제대로 표출되고 해소되지 못하는 분노는 나를 갉아먹는다. 그럼에도 나는 나로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 댕댕이


제일 먼저 닿은 건 부슬부슬한 털의 촉감이었다. 머리카락보단 가느다랗고 실타래보다 부드러운 다정한 색이 겁도 없이 자신을 몽땅 맡겨왔다. 흘러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는 뜨거운 열기가 체온과 맞닿았다. 두려울 정도로 부풀어 오른 조건 없는 마음은 애달픈 몸짓이 되어 간절한 애원을 닳아갔다.


그 맹목적인 고백을 그대로 들었다면 어땠을까. 그것은 단어로 차마 담아낼 수 없는 진심이다. 너의 세상이 온통 나로만 채워지지 않길 바랐다. 허무하게 흘려버린 애정이 아프도록 아깝고 소중해서 어쩔 줄 모르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너에겐 내 목소리가 얼마나 전해졌을까. 너의 한평생에 내가 있었다. 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 각자의 언어로 자신의 말만 토해냈을 뿐이다. 서로를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지만 결국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했던 관계에 다시금 미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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