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이미 지나가버린 나날은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 알면서도 이따금 달력을 거꾸로 넘겨본다. 되돌리고 싶은 날에 가만히 손을 올리곤 그 시간을 미련하게 하나하나 되짚어본다.
이해와 납득의 간격이 이리도 큰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몇 번을 다시 되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하고 변하지 않을 결말을 맞이할 걸 아는데도 어째서 미련이라는 응어리가 멍울지는 것일까.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 했다. 하지만 수없이 선택을 반복했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을 땐 어떡해야 하는 걸까.
고민과, 후회와, 체념하는 속삭임이 멈추지 않을 때면 달력을 들춘다. 숫자로 아로새겨진 그날을 꾹 누르고 문질러본다.
명상
미련을 떨쳐내기 어려울 때면 지그시 눈을 감아 본다. 자연스레 감고 떠지는 시야처럼 마음도 원하는 대로 ON & OFF가 가능하다면 이런 먹먹한 파문이 일어날 일도 없을 텐데.
어디엔가 깊이 뿌리박을 일 없이 그냥 삶의 모든 곳과 모든 것을 스쳐 지나고픈 바람을 속삭여본다. 머물 곳을 찾아 몸을 뉘이게 되면 매 순간마다 질척거리는 미련을 새기게 되므로.
어느 날엔가 큰 욕심 없이 소소한 꿈을 꾸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다. 어리석은 소망을 좇아가다 보면 죽을 때까지 한 움큼 움켜쥔 마음을 끝내 놓지 못할 것만 같았다. 버리지 못할 온갖 욕망이 찌꺼기같이 늘러 붙은 마지막이 두려울 때면 눈을 감고 누워 미련을 깊숙이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증명사진
한동안 지갑 속에 넣어두었던 종이 조각은 몇 년 전의 어설픈 미소를 담았다. 그곳에서 멈춰버린 시간은 어느덧 잊고 있던 과거를 꺼내 보여준다. 싱그럽진 않았지만 생기 있던 그때의 나는 한없이 불안하고 막막했음에도 그 모두를 끌어안은 채 웃고 있었다. 끌어당긴 입꼬리에 매달린 떨림이 얼마나 큰 풍랑이 되어 내 안팎을 이지러뜨렸는지 기억한다. 카메라 렌즈 앞에서 힘겹게 지었던 미소만큼이나 참 어색하고 어설프게 거쳐 온 시간이었다.
현재 고르게 울려 퍼지는 삶의 리듬이 그때의 일렁임을 견딘 결과라는 걸 안다. 기억이 추억이 된 것도, 촌스러웠던 예전 모습을 웃어넘길 수 있는 것 또한 마냥 예쁘지만은 않았던 사진 속 내가 과거를 가로질러 지금의 나와 마주했기 때문이다.
사진으로 순간을 남긴다 했던가. 순간이 모여 낸 시간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몇 번을 반복했으면서도 여전히 어설픔을 감추지 못하는 미소와 맞닥뜨린다.
딸기
주근깨가 잔뜩 껴 얽힌 얼굴은 붉디붉은 것이 곧 터질 것만 같다. 초록빛 끝이 품은 것은 영롱한 생령일까, 아니면 영글지도 못한 채로 뜯겨버린 파리한 한(恨)인 걸까.
한 입 크게 베어 물은 달큼한 상처엔 차가운 물기가 어린다. 때때로 혀가 아린 신 맛은 시린 눈물이 고인 자리다. 윤기가 흘러 반짝이는 몸뚱이는 이미 생명이 다한 허울이다. 꺾여버린 목 줄기가 아쉬워 다시금 고개를 쳐든 얼굴은 검붉은 거죽뿐이다.
물러버린 과육 껍질이 힘에 눌려 벗겨지며 기어이 피부에 붉은 흔적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