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삐죽 튀어나온 날 종이에 휘갈기는 자음과 모음의 합은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삐뚤빼뚤 한껏 뿔이 난다. 동글동글 조약돌처럼 아기자기하게 글자를 빚어낸 날은 방긋방긋 웃음이 나올 것만 같다. 조심스러운 태도가 묻어난 글씨는 몸을 웅크리며 점점 작아지고, 잔뜩 신이 나 끄적일 때면 사방이 큼지막하게 부풀어올라 빵 터질 듯하다.
흰 종이에 나를 담은 형태가 그려진다. 그 형체는 차마 꺼내보지 못했던 깊은 내부를 고스란히 마주하며 새겨진다.
마음 비우기
글자를 하나씩 꾹 눌러쓸 때마다 뒤죽박죽 뒤엉켜 어지러움을 호소하던 머릿속이 점차 단순해진다. 나도 모르는 새 부드러운 날갯짓으로 포르르 날아온 어여쁜 글에 저 깊은 곳에서부터 잔잔한 물결이 일렁인다.
마음 문을 두드리는 점과 선들은 저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어느덧 문고리를 짧고 굵게 흔드는 단어가 되고, 문틈을 비집고 들어가 유려하게 흘러가는 구절의 모습을 갖추고, 열린 문 사이로 수줍게 인사를 건네는 문장이 되어 노래를 부른다.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며 딱딱하게 굳어있던 문에 기름칠을 한다. 빠끔 열린 문틈으로 오랫동안 하염없이 층고를 높여왔던 먼지와 오물과 불순문이 하나둘씩 버려진다. 그렇게 비워진 마음속으로 다만 투명하게 적힌 운율만이 닿는다.
만년필
서걱서걱. 종이가 펜촉에 쓸리며 거스러미가 올라온다. 순식간에 꺼먼 생채기를 내며 아로새겨질 흔적이 남는다.
쉽게 쓰일 것만 같던 문자는 그 짙은 색만큼의 점성이 들러붙어 날카롭고 동글한 펜촉 끝에서 좀처럼 매끄럽게 떨어져 나가지 못한다. 그 뾰족한 끄트머리를 놓쳐버리면 손 쓸 새도 없이 흐물흐물하게 퍼져버리면서도. 아차 하는 순간 검은 물이 뚝뚝 떨어져 어느새 지저분한 흙탕물을 마주한다.
딱딱한 펜대를 손에 쥐고 필압을 조정하는 요령을 깨치는 데는 은근 시간이 필요하다. 만년필 하나를 길들일 때까지 딱딱한 몸체는 좀처럼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은 지겨워질 즈음, 어색했던 딱딱함은 익숙한 단단함이 되어 그제야 흰 종이 위를 누비는 유연한 몸짓을 보여준다. 그제야 온전한 '나만의' 펜이 된다.
글 취향
어떠한 글을 쓰든 간에 그 결과물은 결국 시 또는 산문이라는 커다란 갈래로 나뉜다. 시가 함축적인 표현으로 그리는 이미지와 숨겨진 의미를 음미하는 맛을 준다면, 산문은 실타래를 풀어놓은 섬세한 감정의 줄기를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때로 시와 산문은 구분 짓기 어려운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글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실제로도 그러할 테다.
나는 산문이 좋다. 시가 주는 즐거움도 분명 크지만, 처음과 끝이 이리저리 얽히고설키다 끝내 하나로 연결되는 이야기가 좋다. 내면의 수다쟁이가 쉬지 않고 쫑알대기에 산문이 보다 편하기 때문이지 싶다.
가끔 마음에 맞는 글귀를 만나면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에게 과일바구니를 선물 받아 이를 한 아름 품에 안고 새콤달콤한 향내를 질식할 때까지 맡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