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파랑인 날

춘천 여행

by 하이민

소양강변길


군데군데 하얗게 남은 눈길은 휑하고 고요해

마음속 소란이 가라앉

거울처럼 납작한 강물은 속살대는 바람결에

잔물결을 흔들어 귀를 간지럽혀


고즈넉한 겨울 한가운데서

청명한 파랑을 한가득 들이도 본다

느긋한 공기에 실린 변길을 따라 걷다

해가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들보니


하루가 온통 파랑이다




춘천까지 기차를 타고 가 본 건 처음이었다. 기억 속 춘천은 꽉 막힌 고속도로 체증을 이겨내고, 북적대는 닭갈비집과 카페 구석에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장소였는데 춘천역에서 내린 후 펼쳐진 풍경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고요했다. 한적하고 고즈넉한 교외 지역에 산책을 나온 기분이었다. 서울에서 1시간 만에 강원도의 공기내음을 맡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나선 당일치기 여행에 무리하게 여러 군데를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소소하게 소양강변길을 쭉 따라가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날은 또 얼마나 좋은지 강물과 하늘이 구분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눈앞이 온통 푸르른 날에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햇살을 머금어 시원했다. 낮에는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잔잔한 강변이 거울처럼 춘천 도심과 하늘을 맑게 비췄다. 명경이 이런 건가 싶은 광경이었다. 엄마는 이곳의 풍경이 너무 심심하다며 차라리 속초 바닷가가 더 좋은 것 같다 했다. 하지만 나는 이 밋밋하다 할 정도로 드넓고 조용한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의 강과 산을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강원도답게 그림 같은 산맥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새파란 하늘에 희끄무레한 산등성이가 통째로 박혀 있는 것만 같았다. 산 아래 찰랑이는 강물이 햇빛을 받아 수없이 반짝였다.


소양강변길을 거닐며 아름다운 풍광과 어우러진 기념비와 동상에 눈길이 갔다. 한국전쟁에서 춘천대첩이라 불린 전투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쌀쌀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차가운 동상들은 꿋꿋하게 절박했던 당시를 재현하고 있었다. 가슴 아픈 전쟁의 상흔을 끌어안고 보듬는 모습에 춘천이란 도시를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단순히 관광지로만 생각했던 장소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이었던 거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지만 내가 디디고 서 있는 땅 속에 묻힌 역사 한 자락을 떠올리다 보면 새삼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정적인 미를 갖춘 과묵한 얼굴이 소리 없이 훅 다가온 느낌이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바람이 거세지며 강줄기에 주홍빛이 진하게 묻어나기 시작했다.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물결이 잘게 흔들리다 이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이라도 소용돌이가 생길 듯 일렁이는 물결을 타고 노닐던 오리 떼가 순간 날개를 펴고 물 위를 날았다. 춘천에서 보낸 하루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고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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