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위 밤 산책

동네 설경

by 하이민

눈폭풍


바람이 몸을 뒤틀어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건물 사이사이로 눈발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무섭도록 거칠게 휘몰아치는 흰 덩이들은 눈이라기보다 차라리 하얀 폭풍우라 부르는 게 맞았다.

눈앞에 겨울이 내려앉는다.

세상에 겨울의 무게가 더해진다.

나는 울렁거리는 심장을 가만히 붙들고서 어지럽게 요동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흰 빛에 두 눈이 멀어버릴 때까지 바람이 온몸을 떨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눈 내린 날은 온종일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분명 예전에는 하얗게 쌓인 눈에 설레어하며 눈 구경을 즐겼는데, 어느 순간 설경의 고요함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되었다. 광풍에 몸을 맡긴 채 정신없이 쏟아져 내리던 눈발이 그친 후의 세상은 가끔 아득하기까지 하다. 세상을 매끈하게 덮어버린 눈길이 끝도 없이 이어질 때 특히 그렇다.


전날 사온 밀크티를 마시며 창밖을 힐끔 쳐다보았다. 도통 맑게 갤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하늘에 내일 맞이할 날씨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아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우유로는 희석하지 못한 카페인 때문인지 끝없이 흩날리는 눈꽃송이들 때문인지 오후 내내 속이 울렁거렸다. 두근거림과 울렁임 사이를 넘나드는 상태는 계속 이어졌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더부룩함마저 더해졌다. 이렇게 눈이 잔뜩 내린 날에는 웬만하면 밖에 나가지 않는데, 몸 상태를 보아하니 거창한 운동은 못해도 걷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추위와 맞서야 한다는 결연한 다짐과 함께 검정 롱패딩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문을 나섰다. 바깥공기는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눈 내린 날 답지 않은 온도 때문인지 운무 같은 안개가 눈앞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라는 공간적 배경이 아니었다면 신비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은 모습이었다. 염화칼슘을 뿌린 곳은 질퍽거리며 거뭇하게 녹아내려 두 사람 정도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폭으로 길이 났다. 일직선으로 곧게 난 바닥을 따라 단지 내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은 입구까지만 눈이 치워져 있는 상태였다. 뿌옇게 흐린 시야 사이로 밟히는 눈길은 뽀드득 소리가 났지만, 약간 눅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발 바닥에 눈이 찐득하게 눌어붙는 것만 같았다. 저번에 내렸던 눈은 파삭 거리며 푸석해 며칠 동안 같은 길을 지나가면서도 새로운 눈길을 걷는 기분이었다면 이번엔 습기를 머금은 눈길을 짓이기고 있는 듯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온통 허연 건 매한가지인데도 이렇게나 다른 감상을 받을 수 있다니.


순간, 눈길에 가로등 불빛이 스며들어 자그맣게 반짝였다. 녹아내린 눈 결정이 눈 속에 섞여 빛을 반사한 것이겠지만 완전히 갈린 하얀 보석의 잔해 위에 서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없이 빛났다. 무언가의 잔해는 아련하게 남아 마음을 끌어당기곤 한다. 한동안 눈이 그득그득하게 들어찬 바닥을 바라보니 녹아내린 눈길이 투명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하양과 투명은 비슷하면서도 극명하게 대비되며 공간을 차지해 나갔다. 공원을 돌다 보니 어느덧 만 보를 채웠다. 속은 완전히 가라앉진 않았지만 꽤나 괜찮아졌다. 하얗게 샌 공기를 들이마시며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돌아가는 길, 까만 밤에 하얀 발자국이 종종걸음을 치며 흔적을 남겼다.

keyword
이전 01화일상이 머무르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