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가계부
자꾸 빵꾸가 난다.
자꾸 빵꾸가 난다. 가계부 말이다.
나도 한번 가계부를 써봐야겠다고 몇 번이나 시도했다.
좋다는 가계부 앱을 다운로드해보기도 하고 달력에 소비 총계를 적어보기도 하고 가계부 책도 사봤지만 말짱 도루묵이었다.
필사적이게 며칠을 연달아 가계부를 써도 어느 순간 헬륨 풍선이 바람을 타고 하늘 저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망연자실하게 보고 있는 것처럼 있어야 할 숫자들이 사라진 빈 공간을 멍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빵꾸가 난 가계부도 가계부인가?
가지런히 적힌 숫자들을 촘촘히 따라가다 보면 항목별로 나뉜 소비에 다다른다. 그것은 대체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에 마음을 쏟고 사는지 잘 보여준다.
어떤 곳에서는 숫자들이 와글와글 거린다. 또 다른 곳에서는 소곤소곤거린다. 가끔 새근새근 거리기도 한다. 때에 따라 -무-진공상태인 곳도 있다.
이 숫자들은 가정경제가 결국 다다를 곳이 어디인지 안내해준다.
그렇다면 내 가계부가 향하는 곳은 어디란 말인가. 그곳이 어디인지 대충 예상은 되지만 그것을 글로 적고 싶지 않다. 읽는 분들도 내 마음 이해하시리라.
가계부를 쓰긴 써야겠다.
며칠 전 직장에서 10년 동안 장기근속했다며 부상으로 받은 금 5돈을 받자마자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머릿속으로 다음엔 목걸이를 팔까, 반지를 팔까 고민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꼭 가계부를 쓰긴 써야겠다.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꼼꼼하게, 철저하게, 십원 한 장 안 틀리게 가계부를
쓸 수 없다면, 세상에 둘도 없는 낭만적인 가계부를 한번 써보자.
그래,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자연스러운 가계부를 써보자
가계부인지 수필인지 일기인지 시인지 혹은 나부랭이인지 헷갈리는 가계부 말이다.
숫자는 꼼꼼히 못 채워 넣어도 그 사이사이 빈 여백에서 만날지도 모른다.
첫사랑에게 이별을 통보받았을 때 악다구니를 쓰면서 엄마 앞에서 엉엉 울던 스무살 과거의 나를, 식사 시간에 첫째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첫째가 좋아하지 않는 반찬을 흰쌀밥 밑에 넣어 아 벌린 입에 넣어주는 동시에 둘째가 바닥에 던진 숟가락을 집는 오늘의 나를(헉헉. 이 부분 읽을 때 숨이 차다면 제대로 읽으신 게 맞다), 미래의 시간 속을 사는 나를, 아! 언제나 그립고 그리울 당신을, 그리고 우리... 그래, 우리를.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가계부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