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와 함께 시작된 첫 주식 투자

남편 월급만으로는 '사는 것'은 돼도 '사는 맛'은 없었다.

by 사월의 햇살

“에휴.. 애국자 나셨다.”
둘째 임신 소식을 전하자, 엄마가 툭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럴 만도 했다.

첫째는 만 2세까지 1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고, 입이 짧아 정성껏 만든 이유식을 뱉어냈고, 만 3세까지 모유수유를 고집했던 예민한 아이였다. 엄마는 그 모든 시간을 지켜봤다. 그런 첫 아이의 육아가 겨우 숨 돌릴 만해졌는데, 덜컥 둘째를 임신한 나를 보며 속상한 마음이 앞섰을 것이다.


당시 나는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워킹맘이었다.
인천 집에서 서울 직장까지 왕복 3시간을 오가며 몸도 마음도 점점 지쳐갔다. 결국 인천 자가는 전세를 주고, 회사 근처의 작은 아파트에 월세로 이사를 했다. 남편과 나는 도보 출퇴근이 가능해졌고, 퇴근 후 동네 산책을 하며 “이래서 서울 집값이 오르는구나” 웃던 기억이 난다.


그 무렵, 뱃속 아이가 점점 형태를 갖춰가고, 미래를 계획하지 않으면 불안한 J형 인간인 나는 자꾸만 ‘돈 걱정’에 빠져들었다.

남은 건 전세낀 3억짜리 아파트 한 채.

공무원인 남편의 월급, 그보다 적은 내 월급.

두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막막했다.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사는 것'은 돼도 '사는 맛'은 없었다.

“예체능을 하고 싶다 하면 어떡하지? 결혼자금은? ”

어디까지나 꿈이지만, 꿈을 그릴수록 늘 발목을 잡는 건 ‘돈’이었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무계획형인 남편을 믿기보다는 내가 직접 뭔가를 해보자.


“여보, 우리 전세금 조금 남은 거… 그거 투자해 볼까?”

남편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투자? 갑자기 왜?”

“회사 근처에 증권회사 있잖아. 상담 한번 받아보자. 우리만 모르고 사는 것 같아.”


그렇게 우리는 퇴근 후 증권회사에 갔다. 직원은 활짝 웃으며 우리를 맞았다.
“어떻게 오셨나요?”
“투자 상담받으러 왔습니다.”

그 당시 중국 주식이 고공행진을 하고 있었고, 직원은 몇 배나 오른 차트를 보여주며, “지금이 기회다”라고 말했다.

“수익률은 어느 정도 기대하시나요?”
“4% 적금보다만 높았으면 좋겠어요. 공격적인 건 말고, 안정적으로요.”

그 말에 직원은 웃으며 말했다.
“5% 이상이면, 이미 공격적 투자입니다.”
그때 알았다. 투자는 냉정하다는 걸.

상담이 끝나고 나오는 길, 그 직원이 말했다.

“직장생활 15년 동안 직접 상담받으러 오신 분 처음 봤어요. 잘되실 겁니다. 하하.”

우리는 추천받은 중국 주식을 샀고, 그 후 가끔 수익 실현 조언을 받으며 매매를 이어갔다.


그 사이, 나는 둘째를 출산했다. 회복 중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증권회사 직원의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찍혀 있었다.

“고객님, 지금 코로나 때문에 폭락하고 있어요! 다 매도하세요!”

배를 움켜쥐고 핸드폰을 켰다. 내 계좌 안의 ‘사이버 머니’는 어느새 마이너스로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그날, 나는 내가 산 주식을 전량 매도했다.


혼란스럽고 아쉬웠지만, 그게 내 첫 주식 투자였다.

돌이켜보면 참 어이없는 방식이었다. 공부도 없이 대체로 누군가의 추천만 믿고 매수 매도하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초심자의 행운으로 약간의 수익은 남았다.


“주식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야.”

어릴 적 부모님께서 자주 하신 말이다.

1990년대 후반, 닷컴 버블에 올라탄 아버지는 회사 사주를 모두 팔아 ‘데이콤’이라는 종목에 올인했고, 다음날부터 하한가가 시작되며 억대 손실을 보셨다. 그 충격은 내 안에 “주식은 무섭다”는 신념으로 남아 있었다.


투자 공부 없이 증권사의 추천으로 시작하여 얻은 귀여운 수익은 혹독한 행운의 대가로 몇 배는 더 지불되었다. 그렇게, 나는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겪는 실패와 환희를 맛보며 투자의 길로 들어섰다.


keyword
이전 01화무너지는 순간, 나를 지키기 위한 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