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이상하게 새벽같이 눈이 떠졌는데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옥상에 올라가니 이제 막 해가 구름 사이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 루나가 다가와 인사를 하며 기다렸다는 듯 따뜻한 짜이를 건넸다. 이날도 루나는 대한항공 기내 담요를 예쁘게 둘러싸고 있었다. 루나의 숙소에서 일하는 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우리는 셋이서 모닝 짜이를 마시며 일출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그 시간을 기록하고 싶어 아침부터 나는 또 그들과 사진을 찍었다. 지금도 그 사진을 다시 보면 그 순간이 떠올라 행복해진다.
해가 다 떠오르니 눈이 부시게 맑은 아침이 되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 잠시 성 안을 산책한 나는 늘 그랬듯이 저먼 베이커리로 갔다. 아침으로 빵을 먹고 있었는데 J와 S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S는 나를 보더니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꺼낸 물건은 바로 손톱깎이였다. 정작 나는 물어본 뒤에 잊고 있었는데 잊지 않고 챙겨 와 준 마음이 고마웠다. 둘은 오후에 자이푸르로 떠난다고 했다. 내가 조드푸르로 가는 기차표를 사러 자이살메르 역에 갈 것이라고 하자, 그들은 버스 시간이 많이 남았다며 함께 하기로 했다. 셋이서 릭샤를 타기도 애매하고, 날씨도 좋아서 우리는 설렁설렁 역까지 걷기로 했다.
우리 셋은 많이 달랐지만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자이살메르 성에서 기차역까지는 2km 남짓한 거리였다. 왕복 4km를 오가는 내내 이야기 꽃을 피웠다. 나보다 두 살 많은 그들은 충청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했다. “이~ 그려?”, “겨, 아녀?” 난생처음 실제로 듣는 충청도 사투리가 참 재미있었다.
자이살메르 성에서 출발한 우리는 성벽 둘레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성벽 아래에는 그늘을 따라 과일 장수들이 쭉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도 물건 값을 잘 깎지 못한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인도에서는 정말 흥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물건 가격이 천차만별이 될 수 있다. 그들이 한 상인에게서 바나나를 사기 위해 흥정을 하는데, 솜씨가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다. 전날 내가 바나나를 샀던 가격의 반의 반 가격으로 흥정을 해냈다. 내가 산 가격을 말해주자 그들은 내게 말했다.
“바보 아녀?? 완전 눈탱이 맞았네 이거”
“응? 눈탱이 맞는 게 무슨 말이에요??”
눈탱이 맞는다는 말을 처음 듣는다고 하니 “얘 뭐냐……?”, “진짜여, 가짜여?”라고 다 들리게 이야기를 나누는 둘. 하지만 이내 친절하게 뜻을 설명해주었고 나는 그제야 말 뜻을 알아들었다. 남고, 공대, 군대를 나온 그들은 이후에도 여고, 상대를 나온 내가 모르는 말들을 하곤 했다. 충청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의 차이를 알게 된 것 외에도 처음 듣는 말들을 많이 배운 날이었다.
“아, 그럴 수도 있지!!”
이상하리만치 그들이 편했다. 원래도 사람들과 금세 친해지는 성격이긴 하지만, 이 둘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동네 오빠들 같았다. 티격태격하며 걷던 우리는 서로 말을 편하기 하기로 했다. 이날도 내 눈과 카메라 렌즈는 자꾸 그를 쫒고 있었다. 내가 나온 사진이 아니면 인물 사진은 잘 찍지 않던 나인데, 왜 자꾸 그를 찍게 되는지 정말 이상했다. 한낮에는 날씨가 무척 더웠다. 더위를 별로 타지 않는 나와 달리 그들은 더워서 헥헥거렸다. 그늘만 찾아다니며 걷는 두 사람. 그 뒤를 따라 걷는 나. 큰 대로를 따라 걸으며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하하 호호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기차역에 도착했다. 시간을 재보지는 않았지만 40분 정도 걸린 것 같았다.
인도의 기차역은 늘 붐빈다. 집을 통째로 들고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짐이 많은 사람들, 큰 천을 바닥에 깔고 누워 잠을 청하는 사람들, 연착된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들까지. 기차역의 많은 사람들의 숫자만큼 저마다의 이야기도 가득해 보였다. 델리역보다는 덜했지만 자이살메르의 기차역도 붐비기는 마찬가지였다. 역의 크기가 작아서 더 붐비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예매소 앞에 가니 입이 떡 벌어졌다. 딱히 제대로 된 순서도 없어 보였는데 사람은 어마 무시하게 많았다. 나는 그 속을 비집고 들어갈 자신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곳에서 순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표를 사려다가는 내일이 될 것 같았다. 그냥 성으로 돌아가 여행사에서 버스표를 사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기차역 앞에는 언제나처럼 릭샤왈라들이 즐비했고, 그들은 우리를 막아서며 말을 걸었다.
"알로 마담, 휘치 컨츄리 프럼??(Which country from)"
필요한 단어만 툭툭 던지는 인도인들의 서바이벌 잉글리시는 정말 재밌을 때가 있다. 그렇다 한들 무표정으로 일절 답을 하지 않는 나와 달리 오빠들은 릭샤왈라들과 신나게 아무 말 대잔치를 하기 시작했다.
“아임 프럼 네팔” "아임 프럼 파키스탄"
“유 프럼 네팔?? 파키스탄?? 노노~~ 유 라이어! 아이 노 유 프럼 꼬레아! 웨얼 두유 원투고? 테이크 릭샤, 마이 프렌드”
“위 원 투 고 꼬레아~” "위 원 투 고 홈~"
"테이크 마이 릭샤, 렛츠 고 꼬레아~~"
그 말도 안 되는 대화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는데 너무 웃겨서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오빠들을 향해 “유 라이어!(You liar)”를 외치는 릭샤왈라를 뒤로 한 채 우리는 다시 자이살메르 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