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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금태 Jan 15. 2021

장덕_우리가 기억을 이어가는 것

2021년 장덕의 31주기를 맞이하며

 장덕 트리뷰트 프로젝트 vol2. 모트의 [점점 더 가까워져요] 발매를 앞두고 제작사 대표님께 원고 제안을 받았다. 얼결에 응했지만 응하고 난 후, 생각하니 난 장덕에 대해 크게 아는 바가 없었다. 이것은 결국 글을 작성하는 데 있어 큰 어려움이 되었다. 검색을 통해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찾아 수집했다. 그리고 단어를 억지로 끼워 맞추며, 문장을 만들었다. 내가 쓴 글을 읽어 보았다. 다시 또 읽어 보았다. 마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화면 속 식상한 이야기만 가득했다. 뻔한 이야기가 되고 싶지 않았다. 며칠 고민하며 쓴 글을 과감히 삭제했다. 그러자 뭔가 마음이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 창밖으로 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장덕은 1961년 4월 21일 서울특별시 중구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오빠 장현이 있었다. 1남 1녀 중 막내였다. 아버지는 서울 시립 교양악단 첼리스트였고, 어머니는 서양 화가였다. 한 마디로 전형적인 예술가 집안의 딸이었다. 장덕이 음악에 눈을 뜨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을 이어받은 그녀는 오빠에게 배운 기타로 유년 시절의 외로움을 달랬다.


장덕의 마지막 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담긴 마스터 테잎

 대중이 생각하는 예술가 집안이라면 노래와 웃음이 가득할 것 같지만 그녀의 집안은 그리 화목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사춘기 시절 수면제를 먹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 방황하는 아이들을 보다 못한 어머니는 남매에게 음악 활동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한국의 카펜터스(Carpenters)를 꿈꾼 ‘현이와 덕이’가 결성되었다. 듀오로서 활동은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장덕의 이름은, 안양 예고 재학 시절인 1977년, 제1회 MBC 국제 가요제에서 진미령에게 준 노래 <소녀와 가로등>으로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1979년 10월 어머니가 살고 있던 미국으로 간 그녀는 테네시 주립대학 실용음악과를 다니며 2년간 작곡 공부를 했다. 십 대 시절 피어나기 시작한 그녀의 음악적 재능은 이곳에서 무르익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만난 남성과 가정을 꾸렸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2년간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1983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1983년 <날 찾지 말아요>로 음악계에 돌아온 그녀는 당시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혁신적인 코드 진행과 보이싱을 구사하며 유려한 멜로디를 담은 곡들을 선보였다. 1986년에 발표한 <님 떠난 후>는 당시 가요 톱 10에서 5주간 1위를 차지하였다. 그녀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중적인 스타로 정점을 찍은 그녀였지만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위기가 찾아왔다. 1989년 생전 마지막 앨범이 된 [예정된 시간을 위해] 활동을 앞두고 오빠 장현이 설암에 걸렸다. 이후 활동을 중단하며 오빠의 병간호를 하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 앓고 있던 우울증과 불면증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몰았다.

장덕의 환한 미소가 돋보이는 사진

그녀는 한국 여성 싱어송라이터 계보에서 선구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당시는 여자 싱어송라이터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던 때였다. 그런 편견 속에서도 자신이 가진 음악적 재능을 만개하였다. 여자 가수로는 드물게 바지를 입고 당당하게 활동하는 모습은 이선희, 정수라와 함께 '여자 가수 바지 삼총사'란 웃픈 일화도 남겼다.
 장덕은 스스로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음악만으로 시대의 편견에 승부를 건 진정한 천재 싱어송라이터였다. 그런 그녀가 있었기에 1990년대 다양한 장르를 노래하는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나올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유재하, 김현식, 김광석 등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꾸준히 회자되는 아티스트와 달리 사후 거의 잊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장덕이란 이름을 검색창에 치면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난 검색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뻔한 이야기로 이 글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지면을 빌려 싱글을 준비하던 당시 아티스트와 제작자의 마음, 그리고 내가 느낀 감정을 지금부터 담아 보려 한다.


처음 장덕 트리뷰트 프로젝트가 기획되고 그녀의 조카가 개인 소장한 미공개 사진을 받을 수 있었다. 한 장 한 장 사진 속 장난기 가득한 동그란 얼굴과 환하게 웃는 미소, 그게 너무 보기 좋았다. 보고 있으면 참 기분이 좋아지는 사진이었다. ‘이렇게 밝게 웃는 사람이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안타까운 마지막이 없었다면 더 많은 아름다운 곡들을 우리에게 들려줬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후 하루 중 멍하니 그녀의 사진을 보는 시간이 생겼다.

 알고 보니 장덕의 노래는 어린 시절 내게 익숙한 곡이 많았다. 그녀가 만든 멜로디와 노랫말은 알았지만, 어린 시절 난 그녀의 이름과 얼굴은 알지 못했다. 이 환한 미소를 그때 알았더라면 어디서 들은 후렴구를 따라 부르는 것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진작에 난 그녀의 팬이 되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이제라도 이번 작업을 통해 그녀를 잘 알게 돼 다행이다.

싱어송라이터 모트(Motte)

 이번 프로젝트의 두 번째 주자를 맡은 싱어송라이터 모트(Motte) 또한 그녀를 알지 못했다. 장덕의 노래를 커버하는 것은 처음 그녀에게 단순히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였을까. 처음 불렀던 <소녀와 가로등>은 마음에 썩 와닿지 않았다. 몸에 꽉 조이는 운동복을 입고 체조를 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마음을 지닌 채 완성된 싱글을 내는 것은 썩 내키지 않았다. 이것은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한 제작자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한 곡 더 녹음하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단순히 주어진 곡을 부르기보다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곡을 스스로 찾아보기로 했다. 편곡자와 함께 음악을 찾아들어 보며 그녀는 장덕의 음악과 삶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여러 후보가 물망에 올랐지만 그녀가 고른 것은 장덕의 노래 중 조금은 덜 유명한 <점점 더 가까워져요>였다. 내심 팬데믹 시기가 종식되고 빠른 시일 내에 '사람 사이' 마음과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았다.
 청량한 모던 록 사운드로 편곡된 <점점 더 가까워져요>는 장덕이 우리에게 남긴 미소를 닮아 듣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아쉬움이 남았던 <소녀와 가로등>도 제작자와 스태프의 고민과 편곡자의 후반 작업을 거쳐 좀 더 완성도 높은 사운드로 재탄생했다.
 



트리뷰트 앨범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티스트가 남긴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기억으로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매일 수많은 음악이 나오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과거의 시간으로 잊힌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며 남겨진 사람들은 '추모'란 이름으로 다시금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한다.
이 과정 속 우리는 먼저 떠난 이를 회자한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제작자, 아티스트 그리고 모든 스태프들은, 현재의 시간을 숨 쉬는 장덕에 관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낸다. 이번 작업으로 우리가 느꼈던 아름다운 그녀에 관한 기억이, 노래를 듣는 이에게도 닿기를 바란다.

1월 14일 정오 발매된 [점점 더 가까워져요] 앨범 커버

 이번 장덕 트리뷰트 프로젝트를 통해 저희는 당신의 음악을 현재에 다시금 남기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일이었기에...


"당신의 아름다운 음악을 작업할  있어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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