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그렇게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을까?
2018년 1월 8일, 기다리던 첫 출근날!
면접날 봤었던 벽면을 따라 쭉 진열되어있는 회사 제품들을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당연히 겉치레이긴 할 테지만 회사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인사과 사람에게서 예쁜 꽃병과 꽃도 선물 받았다. 첫 시작치 곤 왠지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나는 왜 그다지도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걸까? 한국에서 데일만큼 데었을 텐데 또 다시금 디자이너로 직장생활을 시작하다니. 왜 디자이너가 되고 싶느냐에 대한 질문에 각자 여러 사연이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오기 때문이었던 거 같다.
디자인을 업으로 삼으려 결심한 그 시점부터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내 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늘 뒤늦게 발동하는 나의 어중간한 재능이 아마 문제였을것이다.
수능이 끝나고 실기시험을 위해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미술학원에서 거의 합숙하다시피 하던 시절, 1지망과 2지망 대학교가 다 떨어지고 3지망 대학을 위해 힘을 쏟던 그 즈음 드디어 뒤늦게 나마 내 그림이 학원 내 상위권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 그림에 아무말씀도 없으셨던 강사선생님이 그때 그런 말을 하셨었다. 조금만 일찍 이 정도 실력을 갖췄었으면 1지망도 문제 없었을 거라고.
나를 가장 잘 안다는 나의 엄마는 대학시절 내 작품의 가장 혹독한 평론가셨다. 엄마 또한 실용미술과를 졸업했고 디자이너로 근무한 경험도 있으셨다. 그 덕에 잘한다는 말보다 부족하다는 말을 훨씬 많이 들은 거 같다.물론 더 잘하라는 좋은 의도로 그렇게 하신 걸 테지만 엄마한테 작품에 대한 한 소리 들을 때마다 속으로 이를 벅벅 갈았다.
두고 보세요! 아무리 그러셔도 나는 디자이너가 되고야 말 거니까.
해외에서 공부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기에 시험 삼아 영어도 배우고 여행도 할 겸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에 도전했다. 그곳에서 낮에는 영어학원에서 영어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한식당에서 서빙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즈음, 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는 식당 주인아주머니께서 어느 날 지나가듯 흘리던 한마디.
쟤가 디자인을 공부한다고? 이렇게 센스가 없어서야 퍽이나 디자인을 잘하겠다.
디자인하는 거와 홀 서빙하는 거랑 뭐가 상관이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들은 나는 또 한 번 이를 갈게 되었다.
아줌마, 꼭 디자이너가 되어서 성공한 다음 다시 이 식당으로 밥 먹으러 올게요.
대학 졸업 시즌, 졸업작품을 위해 교수실을 내 집 드나들듯이 했다. 전날 컨펌받고 학교에서 밤새서 수정 후 다음날 9시가 되기 전부터 교수실 앞에서 교수님을 기다리던 어느 날. 내 작품을 훑어보던 교수님께서 한마디 하신다.
네가 디자이너로 재능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끈기로 뭐든 하긴 하겠다.
그건 칭찬이었을까 아니면 재능 없으니 그만두라는 말을 넌지시 돌려 말하시는 거였을까? 알 수 없는 찝찝함에 집으로 돌아가던 길 내내 누가 보던 말던 펑펑 울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생각했다.
보란 듯이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4학년 중간고사가 끝나고 준비했던 패키지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3개의 상을 동시에 받은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다 입선 혹은 장려상이다.)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이 되었고 그 길을 발판 삼아 디자이너 경력도 쌓고 독일로 와서 원하던 독일 제품 디자인 공부도 하고 또 이렇게 신입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나는 이제 엄마뿐 아니라 온 가족 그리고 몇 안남은 친구들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만약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대학교도 다시 방문해서 교수님과 얘기도 나누고 뉴질랜드의 그 한 식당에 꼭 다시 방문해서 주인아주머니께 디자이너 직함이 박힌 내 명함도 건네 드리고 싶다. 내 방식대로의 복수라고나 할까. 그 당시에는 아팠지만 그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일조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는 거 같다.
일을 하면서 또 나의 부족함을 처절하게 느끼며 맘고생 할 예정이지만 앞으로 검은 머리 파뿌리 되어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 디자이너로 잘 살아남고 싶다.
하나의 꿈을 이루었으니 또 다른 꿈을 꿀 시간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