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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mit Jul 03. 2019

#4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기

너무나 다르지만 알고 보면 비슷하다.

회사 측의 나름의 프로그램에 따라 회사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번 주에는 어느 부서로 가서 뭘 하는지 배우고 다음 주에는 다른 부서에 가서 그들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들었다. 회사에서 자주 쓰는 용어들과 테크닉이 정리된 100페이지가 넘는 PDF 파일도 받았다. 그리고 팀장은 슬슬 내가 뭘 할 줄 아는지 체크하는 과정에 착수하는 듯했다. 


그런데 뭔가 난감했다.


아는 줄 알았는데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회사 보안법상 일괄적으로 프로그램이 설치되기에 개별적으로 뭔가를 시도하려면 IT 팀의 권한자 허락을 매번 받아야 하는 터라 특히 내가 다뤄야 하는 프로그램 심지어 포토샵, 일러스트, 인디자인 툴들 조차 모두 독일어로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동안 영어로 작업하던 나는 멘붕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에 개인적으로 늘 사용하던 한독사전을 설치하고 싶었지만 출처가 불분명하다고 거절당했다. 결국 엉망진창 구글 번역기를 이용할 수밖에.




디자인을 설명하기 위해 쓰는 단어들도 당연히 내가 학교에서 사용했던 어설픈 독일말이 아니다. 내 디자인을 표현하기 위한 전문적인 독일어와 영어 학습 또한 시급했다. 설상가상으로 고객사가 독일 회사가 아닌 경우 영어로 프레젠테이션 아이디어를 설명해야 한다. 내 서바이벌 영어실력으로 어쩔.... 사실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건 나의 2D 테크닉이 업데이트가 안되어도 너무 안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포토샵 자격증을 따고 강사 생활했던 때가 2009년이었으니까 따지고 들면 거의 10년 동안 그래픽 쪽은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었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다 할 수 있다고 그랬나 모르겠다.




닥치면 어떤 식으로는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일단 회사를 통해 최신판 포토샵 책을 주문했다. 그걸 보던 나랑 같이 일하는, 나보다 10살 넘게 어린 직동료가 비웃듯이 말했다.


요새 누가 책으로 프로그램을 공부해요? 유튜브 보면 되는데.


세상이 변해도 한참 변했지만, 그래도 목차를 파악하고 전반적인 테투리를 이해하려면 여전히 나에게는 익숙한 책이 필요했다. 8시간 일하고 집에 가서 나머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부품을 지칭하는 단어도 외우고 우리 회사의 주력 패키지 제조 과정도 공부하고 뒤 처친 그래픽 디자인 스킬도 공부하고 무엇보다 내가 여태껏 사용하던 Keyshot을 내려놓고 회사에서 사용하는 렌더링 프로그램 V-ray 사용법을 새로 익히는데 주력했다.


나의 단어 모음집



사람들과의 관계도 어려웠다. 사생활과 직장생활의 그 적정선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야 자신의 사생활을 조금씩 드러내면서 점점 친해질 수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친절하지만 보이지 않는 철벽을 치고  대하는 것이 느껴졌다. 야근은 장려되지 않는 분위기여서 다들 자기 할 일에 바빴고 일 외에 동료들과 잡담하는 일도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나도 잡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야근 안 하면서 좋은 디자인을 뽑아내는 방법은 하나였다. 회사에 있는 시간에 엄청나게 집중하기.


한국 회사생활과 크게 다른 점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결과물은 여기에서도 당연히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데 일의 진행 과정이나 의사 결정한국보다 훨 민주적이고 이성적이다. 이유 없는 도돌이표도 적은 편이라 좋다. 주당 40시간 근무에 1년 동안 눈치 보지 않고 맘껏 쓸 수 있는 30일의 휴가. 내가 원하면 11시 반부터 1시 반까지 무려 2시간 동안 점심시간을 즐길 수도 있고 아프면 진단서 내지 않고도 이틀은 집에서 쉬어도 되 추가 근무는 휴가로 바꿔서 사용할 수 있다. 한국 회사생활과 크게 다른 점은 또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 일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과 챙겨주는 사수가 있었다면 독일에서는 뭔가 어떤 일이건 스스로 알아서 일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팀장은 내가 어떤 작업을 진행하는지 멀리서 보기만 하고 가타부타 큰 섭을 안 했다. 나를 믿어주는 건 고마운 일인데 해본 적도 없는 이 정도 규모의 프로젝트를 나 혼자 기획하디자인하려고 하니 버겁고 불안했다. (후에 팀장이 말하길 그게 일종에 '얼마 하나' 테스트였다고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적응이 조금씩 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낯선데 뭔가 완전히 낯설지는 않은 뭔가를 발견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독일 사람들이 면서 하는 불만은 내가 한국에서 자주 듣던 종류의 것이었다. 너무 비싸서 이런 패키지는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고전적인 레퍼토리부터 쟤는 일도 안 하는데 나는 이렇게 할 일이 많네하고 죽는소리를 하는 사람, Input은 주지도 않고 뭔가 새로운 디자인과 아이디어만 바라는 다른 부서 사람들 하며, 누가 마주쳤는데 인사도 안 하고 쌩하지나갔다더라 누가 일을 너무 서두르는 바람 실수가 많아 여러 번 처리해야 해서 힘들더라는 둥 사람들끼리의 험담은 기본이고, 묵묵히 하는 사람에게만 더 많은 일이 주어지는 불합리한 일, 시간을 적게 주고 제멋대로인 고객을 상대하느라 얼굴이 상한 동료 등등.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리라고 예상했는데
언젠가 경험해 본 것들을 여기서 또 비슷하게 겪는 게 있었다.


그래서 사람 사는 곳은 결국 다 비슷하다고 하는 건가? 어쨌든 이렇게 나름 적응 중이다. 지금은 초반이라 힘든거겠지. 차차 나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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