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감정이나 생각에 솔직한 편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기분도 매우 사랑한다. 그래서 되도록 싸움을 피하려고 하고 누군가가 다른 의견이 있다고 해도 너는 너 나는 나 하며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다. 물론 내가 정해놓은 경계선을 넘어서면 그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지만.
그런데 평소에 늘 크게 웃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 듣기를 즐겨하며 내 주장을 세게 내세우지 않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나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는 거 같다.
편하다는 그래서 무례해도 된다는.
나를 안다는 지인들조차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하루는 나의 아는 분께서 나에게 자신의 일을 하는데 필요하시다며 로고와 브로슈어 만드는 일을 도와 달라고 하신다. 나름 그분께 고마웠던 기억이 있어서 일종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정성껏 만들어드렸다. 시간도 꽤 걸렸고 수정사항들도 은근히 많았지만 모두 맞춰드렸다. 그분도 결과물에 꽤 만족해하셨다. 그런데 얼마 후 또 뭔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신다. 해 드리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 그 밖에서 본인이 계획한 뭐가 있다며 쭉 내가 할 일거리들을 나열하신다.
내 기분은 묘해졌다.
내면의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 나는 왜 이런 느낌이 들지 하고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되도록 객관적으로 분석하려고 노력해보고 시간을 들여 고민한 후 원인이 나로인해 기인한 것이아니라는 결론이 나면 나는 더이상 참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한다. 조용히 내 입장을 설명하고 그건 안된다고 말하는 거다. 그게 상대편과 나의 관계를 도리어 불편하게 만들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서로에게 나은 일이니까.
나는 디자이너고 그걸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이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업으로 하는 일을 무료로 해달라고 할 수 없듯이 나에게도 그렇다. 그 누구도 나에게 내 업을 무료로 해 내라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재능기부, 열정 페이라는 말이다. 공짜로 너의 어떤 노력과 시간을 내놓으라는 도둑 심보의 다른 말이 아닌가? 기부던 열정이던 일단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하는 거지 남이 강요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닌데 말이다.
생각해 보겠다고 한 뒤 일주일 고민 후에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저번에 해 드린 건 선물이었다고. 그런데 이번에도 선물로 해 드릴 수는 없을 거 같다고. 뭔가를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작업하는 시간보다 작업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더 들어가고 무언가를 디자인함으로 생활비를 버는 사람으로 그 일을 위한 작업시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그렇기에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한 존중을 부탁드린다고.
그분은 좀 충격을 받으신 듯하다. 섭섭하다는 말씀은 없지만 섭섭해하시는 상대의 기분이 느껴진다. 죄송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지금 선을 넘었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으면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것이다.
나는 다소 개인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결혼한 지금도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을 요구하며
내 일, 나의 자아실현 역시 가족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남편과 나를 한 팀이라고 생각할지언정 내가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라고 여긴 적이 없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정말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사실 두 개념이 구별되지 않고 쓰이던 시대도 있었을만큼
아직도 비슷한 개념으로들 많이 알고 있다.
부모님 입장에서도 어렸을 때부터 내가 좀 특이하긴 했었을 것이다. 초등학교를 다닐 당시에부터 나는 나에게 강요되던 모든 규칙, 관습, 가치관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지점에서 아니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의 말 대신 내 마음의 말을 듣고 행동했다. 그래서 주변에서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네 동생은 안 그런데 너는 도대체 왜 그렇게 이기적이니
어떨 때는 주눅들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싫어할까봐 눈치를 보던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사춘기를 넘어선 어느 순간부터 내 생각과 마음을 속이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견으로만 산다는 건 적어도 나에게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게 이기적인 거라면 차라리 이기적으로 사는 게 내 입장에선 나은 일이었다. 그 일로 인해 당장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도 내가 내린 결정에 스스로 책임을 져왔기에 결론적으로는 인생에 크게 남는 후회가 별로 없을 테니까. 그리고 실제로도 정말 그랬다. 내 기억 속 내 인생에는 그다지 후회스러운 일이 없다. 주변사람들의 생각과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적어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은 다 시도해봤으니까.
냉랭한 기운이 나와 그분 사이에 꽤 오래 흘렀지만 그분도 생각을 깊이 해보셨는지 섭섭은 했지만 결국 내 입장을 이해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도 이해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약간의 남은 앙금은 느껴졌지만 이 정도로 마무리되어 다행스러운 일이다.
예술계는 어떤 면에서 좀 가혹한 측면이 있다. 재능이 어떤 식이든 있지 않으면 시장에서 살아남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 작품이 유명해지느냐 아니냐가 유행이나 시대를 타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재능은 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아 고객들에게 선택받지 못한 많은 디자이너들이 배고파서 자신의 꿈을 접는다. 생존이 꿈에 앞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간절히 바라건대 이 세상이 전문가를 말로만 대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말 그들의 재능에 감동했다면 전문적인 기술을 쌓기 위해 노력하고 공부한 값을 제대로 치러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렇게 먹고사는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행복을 밑천 삼아 열정적으로 디자인해서 미래에 올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바꿔줬으면 하고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