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시 독일의 법 테두리 안에서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그 정직원이 되었지만 나는 그동안 회사생활에서 조금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그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해서가 아니다. 조금만 잘하는 듯하면 대단하다 일부러 추켜주는 게 영 찝찝하다랄까? 칭찬을 칭찬으로 듣지 못하는 내 성격도 문제겠지만 내가 아는 사람을 통해 건너 듣기론 독일 사람들이 갑자기 덜 친절해지고 경계하는 기분이 들면 그 시점이 바로 내가 일을 엄청 잘하고 있다는 뜻이라 했다. 왜 우리도 그렇지 않나?
내 상대로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하면 배려해 줄 수 있는 그런 거.
회사 내에서 나의 위치가 약간 그런 정도인 듯한 기분이랄까? 별거 아닌 일에도 네가 그런 생각을 할 줄 아는지 몰랐다는 짐짓 놀란 듯한 반응이며 어렵고 복잡한 문제가 벌어지면 나에게 묻기보다 독일말을 잘하는 다른 동료를 찾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내 능력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 크지는 않다는 인상을 몇 번 받았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 할지라도 이해까지 할 수 있었다. 바빠 죽겠는데 몇 번이고 설명을 반복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한국어 수준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독일어를 구사하고 있는 스스로 때문에 조금씩 위축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독일에서도 1년에 한 번 인사고과가 있다. 우리 회사의 경우에는 7월 초에 새로운 행정이 시작되기에 적어도 6월 전에는 인사평가를 하는 것 같았다. 나의 경우는 정직원 통보를 받고 2주 후에 개인 면담 일정이 잡혔다. 추가적으로 받고 싶은 교육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서도 상의를 할 수 있게 끔 되어있었다. 그런데 평가만 받는 게 아니다. 좀 더 나은 일 처리 방법이라던지 상사의 업무 지시 방식에 대해 바꿔줬으면 하는 점도 면전에서 해 드려야 한다. 상사에 대한 평가라니. 이런 거는 상상해본 적도 없어서 뭐라고 해야 할지 적잖이 당황이 되었다.
평가하는 내용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었다.
1. 성격 (Persönlichkeit)
-일 하는데 얼마나 유연한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선을 다해 회사를 위해 쓸 준비가 되어있는가?
-시간 관리를 잘하는가? 약속을 잘 지키고 일처리를 정해진 기간 안에 해 내는가?
-어려운 과제나 상황 그리고 시간의 압박을 잘 견디고 작업의 질을 평준화해 낼 수 있는가?
-직장동료들에게 친절하고 믿음직한가?
2. 일에 대한 경쟁력 (Fach- und funktionale Kompetenz)
-자신이 맡은 작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는가?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기보적인 지식, 숙련 그리고 적절한 용도에 맞는 과정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일을 하는데 더 좋은 아이디어를 같이 생각하거나 제안하는가?
-문제를 잘 분석하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가?
-작업 결과에 실수가 적고 높은 질을 보여주는가?
-회사 운영에 관련된 상황들을 고려하고 일 처리를 하는가?
-새로운 지식과 절차 그리고 숙련 법을 배울 의지가 있는가?
-긍정적으로 상대를 설득하고 자신의 주장과 반박에 대해 근거 있는 토론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을 위한 인내심은 충분한가?
-효과적으로 생각하고 행위하는가? 고객과 목적 중심으로 사고하는가?
-손실원인에 대해 인식하고 복구시키기 위해 노력하는가?
-회사 자원(작업시간, 돈, 운영자료 등등)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가?
3. 사회성 (Soziale Kompetenz)
-팀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가?
-팀원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는가?
-일에 대해 팀원에게 크리틱을 주는 법 과 받아들이는 법을 아는가?
이에 대해 본인이 생각하는 점수(0점에서 7점까지인데 대부분 4점에서 5점을 주고받는 거 같다)를 미리 나눠 준 설문지에 적고 상사와 마주 앉아 내 생각과 상사의 생각을 교환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점수의 합으로 평균 결과를 낸다. 그 외에도 일에 대한 문제점 개선 방향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상사 생각으로는 내가 잘 못 알아 들었는데도 알아듣는 것처럼 해서 일처리를 할 때가 있는 거 같다고 했다. (아... 찔려) 모르면 그냥 몇 번이고 물어보라고 여러 번 강조해 주셨다. 그리고 저번에 고객 미팅 때 자료 프린트를 안 해놔서 5분 정도 늦는 사태가 한 번 벌어졌었는데 그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한다고 하셨다.(아... 죄송스러워라)
우리 디자인팀은 회사제품 디자인, 마케팅 전략과 디자인 에이전시의 역할까지 1인 다역을 해야만 하는 영소한 팀이다. 디자인 매니저가 없기에 우리 팀의 과제는 개인 과제와 팀 과제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정리되지 않는 일정으로 혼돈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에 대한 해결방안책으로 나는 상사에게 일에 대한 큰 가이드라인(프로젝트명, 누가 담당하고 있는지, 대략적인 이번 주의 목표)을 매주 정리해서 알려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급한 일이 있어도 우리를 독촉하지 않아 주시는 건 감사한 일인데 마감 일정에 대한 인지는 매주 상기시켜 놓는 게 결국 우리 팀을 위해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미에 독일어 수업을 개인적으로 받고 싶다고 요청했다. 이메일 하나 붙잡고 20분 동안 쓰고 고치고 또 쓰는 일상에 작별을 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하셨다.(결정 떨어지고도 내부 행정 서류 때문에 6개월이 지난 후 지원받을 수 있었다는... 독일, 아.. 정말 느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