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두렁에 주렁주렁 매달린 우리 4남매 어머니 탯줄 붙잡고 쑥쑥 뽑혀 올라오기 전의 이야기지요 조용한 시골마을 처녀들의 수틀에서 나비가 훨훨 날아오르던 계절에는 기상이변이 잦았다 하는데요 오뉴월에도 서리 내리는 일이 다반사였던 시절
난데없이 우리 집 감자밭에도 한 무리의 서리가 훑고 간 다음 날 아침이었대요 ‘어떤 나쁜 년들이 잠도 안 자고 우리 감자 다 캐 간 거야’ 좀처럼 꺼질 기미가 없던 할머니의 독설을 잠재운 눈치 빠른 아버지의 말 한마디 ‘내가 감자 캐간 나쁜 년한테 장가들어 감자 값 몇 배로 받아낼 테니 그만 고정하세요 엄니' 아버지 말이 씨가 되었던지 울 엄마는 꼼짝없이 씨감자 되었지요
친구들에게 억지로 끌려가 밭고랑 끝에서 부들부들 떨다 망만 봤다는 처녀의 치마폭으로 홀친 감자밭 한 두렁 그 감자 값 다 갚느라 햇살 좋은 봄 한나절 밭두렁 타고 앉았다가 사십 년을 서리 맞은 울 엄마
어느새 머리에 만발한 하얀 감자꽃이
아직도 허공에 젖을 물리고 있지요
-졸 시 「씨감자」 전문/ 시집 <모서리를 접다>에서
산골에서 태어난 엄마는 일찍이 농사일부터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하셨던 것 같다. 소 먹일 꼴도 베고 또 보리방아를 찧어서 밥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비교적 경제적으로 살만했던 외할아버지는 학구열이 없으셨는지 자식들을 가르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엄마는 초등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보고 성장했다.
당시에 마을에 사는 용순 아버지라는 분이 야학을 했는데 엄마는 그 야학에 가고 싶어서 얼른 꼴을 베어다 놓고 용순 아버지네 집 문틈에서 새어 나오는 천자문부터 삼강오륜, 편지 강독 이런 것들을 혼자 외우면서 한글과 한문을 깨치셨다고 한다. 그리고 학교에서 구구단을 배우고 온 친구한테 구구단을 적어달라고 부탁해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 소죽을 쑤면서 구구단까지 다 터득하셨으니 머리가 꽤 좋은 편이신 것 같다.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고 어느덧 스무 살이 된 엄마가 친구 집 사랑방에 모여 수를 놓으면서 신부 수업을 받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한다.
"야! 우리 배도 고픈데 감자 서리나 할까?"
어려서부터 겁이 많았던 엄마는 친구들을 말렸지만 워낙 짓궂은 친구들 덕에 할 수 없이 감자 서리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는데... 그날 하필 엄마 친구들이 선택한 밭이 우리 집 고구마 밭이었다. 할 수 없이 친구들 성화에 못 이겨 감자 서리에 동참했던 엄마는 밭고랑 끝에서 사람이 오나 안 오나 망만 봤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감자 서리를 해서 맛있게 쪄 먹은 다음 날에 일어났다.
아침에 밭에 나갔다가 감자밭이 파헤쳐지고 감자 줄기만 남아 있는 밭고랑을 확인한 할머니가 노발대발 화를 내셨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것들이 남의 집 고구마 밭을 다 훑어 간 거야? 잡기만 해 봐라! 내가 가만 두나"
좀처럼 할머니의 화가 가라앉을 기미가 안 보이자 그때 할머니의 귀하디 귀한 아들인 아버지가 나서서 할머니의 화를 누그러뜨렸다고 한다.
"아이고!~ 엄니! 진정하셔요. 감자 누가 캐갔는지 잘은 모르겠으나 우리 집 감자 캐다가 쪄 먹은 색시 잡아다가 내가 장가들면 될 것 아니에요"
그날의 감자 서리는 이렇게 일단락이 되었고, 엄마는 아버지의 호언장담처럼 어느새 감자밭 주인 아들과 혼례를 치렀던 것이다. 정말로 아버지가 별 생각이 없이 던졌던 말이 씨가 되어 엄마와 맺어진 셈이니 참 신기한 노릇이었다.
두 분이 혼인하고 사십여년이 흐른 어느 날, 저녁밥상에서 내가 아버지한테 조강지처의 뜻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아빠! 조강지처의 뜻이 뭐예요?"
"응 조강지처는 술지게미를 같이 먹고 힘든 시절을 견딘 아내를 뜻하는 말이란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니 엄마야 말로 조강지처의 원조였던 것 같다. 니 엄마가 우리집 감자 서리를 했을때부터 나에게 시집오게 되어 있었거든"
내 옆에서 아버지의 설명을 들은 엄마가 사뭇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나 당신한테 시집와서 사 남매나 낳아줬으니까 그때 캐 먹은 감자값 다하고도 남았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 이제 친정으로 돌아갈 테니까 나를 처녀 때처럼 만들어놔"
엄마의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내가 당신을 처녀로 만들어 줄 수만 있으면 나도 좋것네! 그런데 아쉽게도 나한테는 그런 능력이 없어서 미안허이"
나는 그날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부모님한테도 젊고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엄청 신비롭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