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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현 Oct 12. 2020

026_1년 4개월 뒤 떠나자는 약속

여름과 나는 지금으로부터 1년 4개월 뒤에 떠나기로 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늘 그랬던 것처럼 여름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말하고, 나는 1년 4개월 뒤에 떠나자고 말했다. 어디로부터 어디로 떠날 것인지를 정하지 않아도 우리는 떠난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었다. 


1년 4개월 뒤에는 지금 사는 집의 계약이 만료된다. 우리는 벌써 9개월을 같이 살았다. 주위 사람에게 여름과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면 꼭 결혼은 언제.. 라는 말이 뒤 따라 나온다. 나는 그건 모른다고 답한다. 여름은 지금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내게는 결혼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가깝다. 결혼을 왜 해야 하는지, 지금 여름과 같이 살고 있는 상태에서 무엇이 바뀔지, 결혼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올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결혼을 아직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1년 4개월 뒤에 떠나자고 말한 것은 결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가 결정한 것은 특별하게 지칭할 수 없는 어떤 세계로부터 떠난다는 뜻이다. 어쩌면 서울을 떠날 수도 있고, 아니면 각자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둘 수 있다. 코로나 19의 상황이 좋아진다면 한국을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든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편견과 시선, 기준에서 벗어나서 지금이 아닌 어떤 상태가 되는 게 우리의 목표다.


여름은 1년 4개월이라는 시간을 굳이 정할 필요가 있냐고 물었지만 나는 시간을 정해야 떠날 준비를 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우리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에 가깝다. 너와 여름은 1년 4개월 뒤에 떠나게 될 거야. 그러니 어서 준비해 라고 말이다. 사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는 전혀 모르겠다. 어디로 떠날지도 모르는데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떠날 준비를 하는 건 어떤 곳에서든 무언가를 창작하는 일을 계속하기 위함이다.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혹은 그걸로 돈을 벌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럴 수 없더라도 무언가를 쓰거나 그리거나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럴 준비가 된다면 나는 어디든 기꺼이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여름은 아직 불안하다고 말했다. 정말로 가진 것들의 일부를 버리고 떠날 수 있을지, 그럴만한 준비가 될지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여름에게 확신을 주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에게도 없는 확신을 줄 수는 없으니까. 그때 우리가 떠나게 될지, 우리가 머물 좋은 곳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다짐은 여름과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떤 곳에서든 행복하리라는 것이다. 그걸로 충분하냐고 묻는다면 충분하길 바란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 다짐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을 아직 떠나지 못하게 만든, 떠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조건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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