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스리랑카] 뚝뚝 타고 스리랑카 일주, 3,375km 아루감베이
아루감베이는 세계적인 서핑 명소로 알려진 작은 해안 마을이다. 콜롬보에서 승용차로 7시간, 버스로 10시간이 걸릴 정도로 멀지만 서핑 시즌인 4~9월에는 성수기를 이룬다. 하지만 비수기에 방문한 아루감베이는 단풍이 지고 난 겨울나무 같았다. 문을 닫은 서핑보드 대여점과 식당이 성수기의 여행자거리 분위기를 가늠케 했다. 여기저기 붙어있는 말라비틀어진 서핑 강습 전단지가 파도처럼 들이닥쳤던 서퍼들을 대신했다. 아루감베이 해변도 마찬가지였다. 근처에는 수십 개의 숙소가 있었지만 잡초가 자라고 의자가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여행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물을 던져 낚시 중인 어부만 소나기를 맞으면서 열심히 생업에 나설 뿐이었다. 확실한 성수기, 그보다 더 확실한 비수기로 나뉘는 아루감베이의 풍경이었다.
숙소인 칠리 호텔(Cili Hotel & Pizza Restaurant) 1층에서는 화덕을 갖추고 피자를 팔았다. 마침 숙소 주인이 밤이 되면 새해를 맞아 파티를 열거라며 주문을 부추겼다. 이런 분위기에 다른 식당을 찾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아 피자를 먹겠다고 대답했다. 방은 넓고 깨끗했다. 에어컨도 시원하게 나왔다. 그때 파도소리가 들렸다. 천둥처럼 크지는 않지만 파도가 모래를 쓸고 내리는 묵직하고 익숙한 소리였다. 방문을 열고 나가 선베드에 누웠다. 파도소리가 서라운드 스피커처럼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그래, 아루감베이는 비수기이지만 아루감베이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여행자를 위해 준비된 아루감베이 말고 평범한 아루감베이를 볼 기회였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뚝뚝에 시동을 걸었다. 목적지 없이 길을 나선 건 처음이었다.
먼저 들른 곳은 아루감베이 남쪽 해변에 있는 악어 바위(Crocodile Rock)였다. 오늘 악어를 보았기 때문인지, 악어 떼가 출몰하는 바위라고 생각했다. 근처에 뚝뚝을 세우고 조심조심, 악어가 달려들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주변에는 해변과 모래톱이 보였다. 다시 보니 악어 바위는 악어를 닮았다. 길고 야트막한 바위 언덕이라서 악어 바위였다. 하지만 악어 바위에 올라 아루감베이의 빼어난 풍경을 감상할 때 실제로 악어를 보았다는 후기도 있었다. 나는 그런 말에 쉽게 불안했지만, 불안에 익숙해지는 것도 재미있었다. 많은 관광객이 일출, 일몰을 보기 위해 악어 바위에 오른다고 하는데, 이날은 두세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신 소와 염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일몰 전에 악어 바위 쪽으로 건너가려는데 강한 물살이 가로막았다. 먼저 간 이들은 다른 길로 간 것 같은데, 애써 찾아가고 싶진 않았다. 아무 곳이나 길이 닿는 대로 뚝뚝을 몰았다.
“이상하네. 아무리 비수기라도 외국인을 처음 보는 게 아닐텐데. 뚝뚝을 타고 다녀서 그런가.”
수많은 이들의 눈동자가 나를 쫓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른들도 흘깃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웃었고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내가 그들의 이목을 끈다는 건 확실했다. 때론 이런 관심이 내가 여행 중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좋았다. 어쩌면 해변과 그 주변에 형성된 여행자거리가 아니라면 외국인을 보는 게 낯설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뚝뚝은 작은 골목을 돌며 집 앞에서 아이를 업은 엄마, 교복을 입고 노는 아이들, 담배 피는 아버지를 지나쳤다. 무슬림 옷인 쿠르타를 입고 몰려다니는 청년들이 보였다. 아루감베이는 이슬람을 따르는 무슬림과 힌두교를 믿는 타밀족의 비율이 불교를 믿는 사람보다 많은 곳이다. 그만큼 달라진 분위기를 동네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골목 드라이브를 마치고 작은 다리를 건너 탁 트인 곳으로 나갔다. 평야 같은 넓은 논을 가로질렀다. 가로수가 도열한 외길이 서울에 있는 우리 집으로 데려다 줄 것처럼 아늑했다. 한 편에서는 미풍에 논이 일렁이고 한 편에서는 햇빛을 살며시 머금은 물결이 찰랑였다. 내 마음은 일몰보다 앞서 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 중에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좋아. 어떻게 모든 게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있을까.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아. 원래 내 자리로 온 것처럼 편안하고 그냥 다 좋아. 남은 스리랑카에서도 이런 순간을 자주 만난다면 좋겠어.”
강, 논, 호수, 숲, 나무, 사람. 나는 단어에 맞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 이미지는 처음에는 배운 것이었으며, 배운 뒤에는 조금씩 발전되었다. 하지만 그건 여전히 고유한 이미지였다. 누가 내게 논을 그리라고 하면 나는 황금색 논만 그릴 것이다. 사람을 그리라고 하면 직업이나 생김새, 옷차림을 신경 써서 그릴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강에는 호수가 있고, 호수에는 논이 있고, 논에는 숲과 나무, 그 속에는 사람이 있었다. 순서나 조합은 상관없었다. 이것들은 함께 있을 때 너무 자연스러워서 하나씩 구분하기 힘들었다. 나는 오늘, 동화 같은 풍경 속에 잠시 머물렀다는 게 감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