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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드 Oct 23. 2024

Ep 27. 길에서 야생 코끼리를 마주칠 확률

[와일드 스리랑카] 뚝뚝 타고 스리랑카 일주, 3,375km 야생 코끼리

아루감베이와 포투빌 석호를 떠나 본격적으로 남부 해안 도시를 하나씩 돌아볼 생각이다. 포투빌에서 남부 해안 도시의 기점인 함반토타까지 직선거리는 약 90km. 하지만 쿠마나 국립공원과 얄라 국립공원이 가로막고 있어 한참 돌아가야 한다. 구글 지도의 경로는 190km로 늘어났다. 하루에 가기엔 부담스러운 거리다. 그래서 경로 중간에 있는 남부 내륙도시 카타라가마에서 하루 쉬어 가기로 했다. 카타가마라까지의 거리는 130km. 그중 90km는 엘라에서 아루감베이로 올 때 여왕의 화장실과 라후갈라 국립공원을 들르며 지났던 길이다.

한 번 지나온 길은 길의 상태와 소요 시간을 짐작할 수 있어 그만큼 안정감이 들었다. 그래서 재정비를 하지 않고 비에 쫄딱 젖은 채로 출발했다. 얼마 후 라후갈라 국립공원에 들어섰다. 오늘도 수많은 새와 악어를 볼 수 있을까. 길가에서 고양이가 털을 세우듯 날개를 활짝 핀 공작이 여러 번 나타났다. 뚝뚝이 빠른 속도로 다가가자 공작은 날개를 접어 긴 꼬리를 만들고 껑충껑충 뛰었다. 나무에 매달린 원숭이도 뚝뚝을 따라오며 재롱을 부렸다. 뚝뚝은 길을 막고 잠든 큰 개를 피해 자연스럽게 국립공원의 일부로 흘러 들어갔다. 진흙에서 쉬고 있는 소떼가 나타났고 악어를 만났던 다리를 지나쳤다. 울창한 숲은 뜨거운 햇볕을 가렸다. 숲속에서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마치 선루프를 열고 달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뚝뚝 로드트립이 뚝뚝 사파리 드라이브가 되는 순간이었다.     


라후갈라 국립공원을 빠져 나왔다. 익숙함 때문인지 길에는 생기가 넘쳐 보였다. 어쩌면 내게 여유가 생긴 덕분인지도 모른다. 남부 내륙 지역의 특성과 매력을 조금씩 체화한 건 아닐까. 오늘 이 길에는 사람들의 생활이 엿보였다. 버스에 오르내리기 위해 손을 흔드는 사람들, 늘 도로 한 가운데서 아슬아슬하게 자고 있는 개에게 밥을 주는 사람, 아이를 앞뒤로 태우고 스쿠터를 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길에는 필연적으로 삶이 머물고 또 잉태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뚝뚝의 속도를 높였다. 이제 여행은, 낯섦이 지배하는 초보 딱지를 떼고, 표면을 넘어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    

 

뚝뚝은 거침없이 달리다가 길게 늘어선 차 행렬에 속도를 줄였다. 신호도 없는 길에 정체라니,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불안했다. 앞쪽에 선 어떤 차는 방향을 돌려 되돌아왔다. 나는 뚝뚝에서 내려 앞쪽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히 차 사고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심각했다. 높이 30m 정도로 보이는 거목이 쓰러져 왕복 2차선 도로를 완전히 막고 있었다. 비켜 갈 공간이 전혀 없었다. 반대 차선에도 오도 가도 못하는 곤경에 빠진 차가 밀려 있었다. 나무를 치울만한 중장비가 있을리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당황하지 않았다. 어디서 났는지 전기톱을 구해와서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구글 지도를 살폈다. 우회로가 보였다. 하지만 확대해야 겨우 보일 만큼 작은 길이었다. 과감하게 핸들을 돌렸다. 어떤 길이든 상관없었다. 구글 내비게이션에서 벗어나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몸집 작은 뚝뚝이 못 갈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 운전도 확실히 자신감이 붙었다. 우회로는 약 25km, 쉬지 않고 달리면 40분 만에 다시 큰길과 만날 수 있다. 어떤 길이 나타나게 될까, 기대감을 가지고 집중력을 높였다. 길은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졌다. 언덕 사이에 난 바른 땅을 다듬어 만든 큰길이 아니었다. 처음 생긴 그대로 이어진 길, 그 길가에도 드문드문 집이 보였다. 당연히 사람도 보였고, 나무를 엮어 만든 구멍가게도 나타났다. 외국인은커녕 여행자도 지나다니지 않을 호젓한 길이었다. 관광객이 많은 고산 지대 도시, 여행자를 위한 아루감베이의 작은 마을 그리고 여행과 아무런 상관없는 이곳. 모두 스리랑카이다. 하지만 뚝뚝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행과 관광을 위한 스리랑카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큰길로 합류하자 짜릿함과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나무를 치웠는지 차들이 막힘없이 달렸다. 만약 내가 택시나 버스를 탔다면 나무를 치울 때까지 꾸벅꾸벅 조는 게 전부였을 것이다. 나는 무언가 얻은 사람처럼 의기양양하게 뚝뚝을 몰았다.


출발한 지 2시간 30분 만에 부탈라(Buttala)의 교차로에 도착했다. 이제 방향을 틀어 남진을 시작할 때다. 그런데 허기가 몰려왔다. 새벽 일찍 일어나 비까지 쫄딱 맞으며 쌓인 피로도 풀고 싶었다. 버스정류장 옆 빈 노점에 뚝뚝을 세우고 비상식량, 라면을 꺼냈다. 냄비에 물을 붓고 스토브 위에 올렸다. 이 모습을 본 동네 주민이 다가왔다. 모녀 사이인 그들은 한국에서 온 캠핑족을 반갑게 맞이했다. 물이 끓는 동안 같이 사진을 찍었다.


스리랑카에는 길가에서 옥수수를 삶아 파는 노점이 어디에나 있다. 지붕도 벽도 없고 가판대와 솥 걸이만 있는 간이노점이 대부분이다. 자주 비가 내리고 원체 물이 많고 습도가 높아서 땅과 나무는 늘 촉촉했다. 커다란 솥에서 옥수수를 건져 올릴 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보며 얼마나 입맛을 다셨던가. 캠핑 의자를 펼치고 뜨거운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라면을 해치웠다. 주변을 갈끔하게 정리했다. 카타라가마까지 남은 거리는 40km. 긴 여정의 끝이 보였다. 여유가 생겼다. 배도 든든했다. 뒤에 앉은 R과 B는 졸기 시작했다. 고산 지대에서는 추위와 들이닥치는 비 때문에 고생했고, 엘라에서 벗어난 뒤로는 새로운 세상과 동물 구경에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익숙해졌고, 따뜻하고 배부른 여유가 숙면을 재촉했다. 덜컹거리는 뚝뚝의 진동은 진즉 적응했는지 깨지 않고 고개만 위아래로 흔들었다.   

“야!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야! 야!”

나는 소리치며 내 목이 잠겨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더 크게 소리쳤다. 급하게 뚝뚝의 속도를 줄이며 시동이 꺼지지 않게 신경 썼다.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왜? 무슨 일인데? 뭐가 있는데?”

깊은 잠에서 깬 R과 B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야! 코끼리야. 코끼리가 길을 막고 있어!”     

나는 코리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소름이 돋은 채 소리쳤다.     

“우와아아, 코끼리다!”

R과 B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코끼리는 왕복 2차선 도로 중앙에 서서 차들이 비켜 갈 틈을 주지 않았다. 위풍당당했다. 일당백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무도 감히 코끼리를 재촉할 수 없었다. 코끼리는 왼쪽 차선으로 몇 걸음 옮겼다. 틈이 생기자 버스가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그런데 버스와 나란히 선 코끼리는 버스만큼 덩치가 컸다. 코끼리를 자극했다가는 작살날 판이었다. 문득 렌트 업체 사장의 당부가 떠올랐다.


‘코끼리를 만나면 무리해서 지나가려고 하지 마세요. 그리고 절대 뚝뚝에서 내리지 말아요. 코끼리가 공격하기 시작하면 뚝뚝도 차도 다 부숴버리거든요. 틈이 생기면 직진만 해요.’


나는 버스 뒤에서 코끼리의 눈치를 살피며 속도를 유지한 채 코끼리 옆을 지났다.     


우리는 한동안 코끼리가 남긴 흥분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여행 중에 야생 코끼리를 한 번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나누었는데 현실이 되었다. 스리랑카는 정말로 하나의 큰 동물원이었다. 앞으로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흥분이 가라앉고 수다가 줄어들자 R과 B는 다시 졸기 시작했다. 나는 상념에 잠겼다. 그때 코끼리가 또 나타났다. 더 큰 녀석이었다.     


“야! 야! 일어나. 코끼리, 코끼리야!”     

R과 B는 이번에도 허둥대며 일어나 놀란 토끼 눈으로 코끼리에 빠져들었다.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나다니. 우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또 수다에 빠졌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날 우리는 불과 20여 분 만에 도로 한복판에서 코끼리를 네 번 만났다. 아침에 석호에서 본 코끼리까지 합치면 다섯 번이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스리랑카에서는 운이 좋다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카타라가마 근방은 얄라 국립공원이 있어서 이렇게 도롯가로 나온 코끼리가 자주 목격되었다. 사람들이 남긴 후기 중에는 코끼리의 심기를 건드려 발로 밟은 콜라 캔처럼 납작해진 차나 창문이 박살난 뚝뚝의 사진도 있었다.     


문득 아침에 뱃사공이 한 말이 떠올랐다. 코끼리는 어디에나 살고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가깝게 살고 있다는, 생활 반경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가 놓친 행간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사람과 코끼리는 함께 살고 있다. 야생이란 단어는 비야생과 경계 짓기 위한 인간의 언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생은 공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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