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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할수록 새로워져야 한다.

매일이 경이롭다.

by 문하현
평범하고 익숙하며 흔한 것을 의식적으로 지각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한 대상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가 알아차리지조차 못하는 배경으로서 대상을 도드라지게 만들고 눈에 띄게 만든다. 경이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대상과 마주한다는 의미다. 다르게 말하자면 경이는 이미 인식하고 있는 평범한 것을 특이한 것으로 바꿔낸다. 그렇게 경이는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영역을 확장시킨다. 주체가 세계에 드러나기 위해서는 경이가 선행돼야 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것이 우리를 움직일 때, 우리는 경탄한다.
<감정의 문화정치>, 사라 아메드

'편안한 사이일수록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조언을 한 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상당히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가끔 가다가도, 진부한 조언일지라도 뼈아프게 실감할 때가 있다. 너무 편안해진 나머지, 흥건한 물에 흠뻑 젖어 흐릿해진 물감처럼 흐물흐물해진 경계를 어느 순간 단숨에 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일부는 상대방을 편안하게 느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곤 한다. 여기서 편안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언제부터 찾아올까? 상대방과 내가 '일심동체'라고, 거의 망상에 가까운 착각을 저지르게 될 때다. 처음에는 분명히 '나'와 '당신'을 뚜렷하게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계를 형성하는 시간이 조금씩 쌓일수록 철통경계를 위해 높게 쌓아뒀던 벽을 스스로 낮추게 된다. 결국, 반으로 접으면 양쪽이 똑같이 찍혀서 완성되는 데칼코마니처럼 독립적인 영역을 구분할 수 없는 '우리'가 되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무엇이든 같을 것이라고 속단하는 시점부터 단단하고 질긴 굴레가 조용히 '우리'의 뒤를 덮치기 시작한다. 이 굴레는 한쪽이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는 이상은, 언제 굴레가 덧씌워졌는지도 모른 채 서로를 서서히 옥죌 것이다.


여기서 편안하다는 상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편안함이란, '평소와 다른 점'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익숙하거나 나와 딱 맞다'는 생각이 들 때 편안하다고 말한다. 언제 불편하다고 느끼는지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예컨대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물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책상 위에 놓여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물체가 '불편하게' 느껴져 당장 눈밖으로 치워버리고 싶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대상이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와서는, '어떠한 경계도 없이 푹 잠겨있었던' 느낌을 해치기 때문이다.


익숙함을 멀리하겠다고 갑자기 벽을 다시 높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관계는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 같은 편안함에서 안정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부드러운 경계'를 세울 수 있을까? 단순히 선을 넘지 않겠다는 자세도 중요하다. 익숙한 대상을 의식적으로 자각하려는 노력이 쉽지 않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경이로움은 미처 인식하지 못한 것을 마주할 때 느끼게 된다.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면 나의 외부를 인식하는 영역도 자연스레 확장된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에 대해 다 안다는 착각에 머무르지 않고 알지 못했던 점을 적극적으로 탐색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은 매일 똑같지 않고, 심지어 몇 시간마다 달라질 수도 있다. 어제의 상대방과 오늘의 상대방은 사소하지만 분명히 다른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매 순간 상대방의 다른 점들을 포착할 때마다, 지긋이 눈으로 담아내서 오랫동안 경이로움을 만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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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