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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배려라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결과적으로 나에게 이로운 일이다.

by 문하현

한 번씩 '미처 배려해주지 못했던 상황'을 되돌아볼 때가 있다. 이럴 때 좀 더 관심을 가져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반추하게 된다. 말 그대로 사소하기 때문에 놓치기 쉬운 배려들이 아련한 기억처럼 새록새록 생각나곤 한다.


엄밀히 말해 배려는 의무가 아니다.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배려란 '+1'이라는 개념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이타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없어도 상관없지만 있으면 더 좋은 것이다. 배려가 필요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상황에 놓인 누군가가 배려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선택의 문제를 떠나서, 본인이 여유가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면 타인을 신경 쓰기도 쉽지 않다.


나는 배려가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이라 하더라도 할 수 있다면 실천하는 게 낫다는 입장이다. 배려는 행위자에게 있어 더 좋은 결과로 돌아올 수 있다. 배려하는 만큼 상응하는 대가를 받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배려하는 행위 자체가 사회 감수성을 높이도록 행위자를 이끈다. 쉽게 말해 '역지사지'의 수준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타인에게 '어떤 행동이 배려로 느껴질지'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행위자의 시선이 자연스레 타인의 시선과 엇비슷해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면 너무 소극적이지도, 그렇다고 너무 과하지도 않은 '적정선의 배려'를 실천하게 된다.


무엇보다 배려가 '재생산'되는 과정을 통해 나와 타인, 그리고 당장은 눈앞에 보이지 않겠지만 사회에도 이롭게 작용하게 된다. +1은 작은 잉여에 불과했지만, 거듭 반복되면서 +1000... 이상의 엄청난 잉여로 돌아오게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받는 대로 배려를 실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누군가는 배려를 다른 방식으로 되돌려줄 것이다. 내가 실천했던 배려가 같은 형태로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다른 형태로 더 많은 배려를 받을 수 있게 될지 모른다.


배려의 이점이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방법은 '사소한 배려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배려하게 됨으로써 타인의 시점을 세심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사소한 배려는 재생산되기 쉽다. 배려를 하는 입장에서는 부담 없이 실천할 수 있고, 받는 입장에서는 가볍게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무 사소해 보일지라도, 적절한 배려를 실천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면 가벼이 지나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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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