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근무는 좋아요
남편이 오랜만의 회식에 술을 진탕 먹고 들어왔다. 코로나가 끝나니 윗분들은 신나게 60명 단체 회식을 잡았다고 한다. 돌아다니며 술을 권하는 상사의 술을 받아내느라 1차가 끝나고 도망친 남편도 꽤나 많이 취했다. 술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지만 이런 술은 정말이지 싫다.
사실 나는 회식을 좋아하는 회사원이었다.
5년 전 이 회사로 입사를 했을 때 회식을 은근히 즐기는 신입사원이었다. 공짜 술을 마실 수 있었고, 적당히 아저씨들의 라떼 이야기를 들으며 비싼 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 퇴근 후 원룸에 나를 구겨넣기 싫어서 저녁 식사를 하자는 권유들도 좋아했던 편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계속 바뀌어가고 있었다. 우리회사는 '소문'에 굉장히 민감한 회사였다. 회식에서 불미스러운 일들이 발생했을 때, 회식금지 명령이 떨어졌다. 회식을 하게 되면 점심회식으로 진행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점심회식은 너무 괜찮았다.
점심시간은 아무리 팀장님이랑 같이 가도 1시간~1시간반 이면 끝났다. 공감안되는 상사들의 옛날 이야기를 들을 이유도 없었다. 막내였던 나는 회식장소를 예약하는게 조금 일이긴 했지만, 그정도는 1~2분만 쓰면 되는거라 상관없었다. 아니 이렇게 회사돈 쓰는게 마음 편한 일이었나?
코로나가 좋은 점도 있었다.
복직을 하고나니 코로나가 심해져 회식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저녁시간은 온전히 나 또는 내 가족을 위해 쓸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작년 말부턴 전면 재택근무가 되었다. 회식은 커녕 한달에 같은 팀원들 1~2번 볼까말까였다. (한 번도 못본 사람도 있다) 업무의 자율성은 늘어났고, 나의 시간을 더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여전히 과장 이상 윗분들은 재택근무가 불편하다고 얘기한다. 왠지 예전처럼 '마음대로 일을 시킬 수가 없어서' 인 것 같다. 업무지시는 메신저나 메일로 해야하고, 예전처럼 토픽만 던져주고 '알아서해'가 안되기 때문이다.
1.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
2. 이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
3.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생각보다도 많은 상사들이 이 기본적인 3가지도 없이 업무지시를 하곤 한다. 두루뭉술한 업무지시 속에 뭐라도 해오면 나중에 다시 수정하라고 한다. 수정을 여러번 거치더라도 가이드라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다.
재택근무 포에버!!
메신저나 메일은 기본적으로 업무를 정리해서 지시해야 하는 특성이 있다. 뭔가 소통을 할 일이 있어도 메신저는 받는 사람이 원하는 때 읽을 수 있다. 회사에 출근하면 팀장님이 'OO씨 잠깐만~' 하면 내가 하던 일을 내려놓고 불려가야 했다. 재택근무를 하며 업무의 양은 다르지 않았지만(오히려 인원을 줄여서 더 많음), 업무의 질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가끔 협력사 미팅을 하면 "재택근무를 하면 일 안하지 않나요?" 물어보기도 한다. 한 두명만 재택근무를 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전 직원이 다 재택근무를 하면 일은 꽤나 잘 돌아간다. 적응하기 위해서 시스템을 계속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업무는 매뉴얼만 잘 만들어놔도 원활하게 돌아간다.
출퇴근 시간을 아끼고, 쓸데 없는 회식을 안가도 되고, 나의 시간을 소중하게 쓸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하다. 코로나 이전에는 왜 그렇게 회식과 모임을 많이 참석했던 것인지도 이제는 상상할 수가 없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고 나에게 편한 쪽으로 변화된건 다시 돌이킬 수가 없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원래 같았으면 출근길 버스에서 치이고 있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