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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쉬워도 응원은 어려워서

by 리틀 골드문트

우연히 만난 페이스메이커 이야기

마라톤 하기 좋은 날씨다. 요즘같이 미세먼지 없는 날이면, 베란다 너머로 선명하게 보이는 풍경이 반갑다. 저 멀리 남산이 또렷이 드러나고, 아파트 숲 너머 짙게 물든 산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20대 초반, 마라톤에 관심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다. 5km, 10km 단거리 코스를 몇 번 뛰다가, 어느 날 무턱대고 하프마라톤에 도전해 버렸다. 연습도 없이, 지식도 없이, 그냥 달리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21km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준비 운동도 없이, 무릎 보호대도 없이 달리기 시작한 나는 곧 한계에 부딪혔다. 그래도 포기란 없었다. 죽을 둥 말 둥, 그저 열심히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헐떡이고, 무릎은 욱신거렸으며, 정신은 점점 흐릿해졌다. 그즈음, 길가에서 나를 향해 "파이팅!"을 외치는 사람들을 만났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해맑게 웃으며 보내준 응원은 그 힘든 순간에 큰 힘이 되었다. 기습적으로 받은 응원에, 나도 찌푸리던 얼굴을 펴고 힘차게 "파이팅!"으로 화답했다. 거리 곳곳에서 날 향해 건네던 그 목소리들이 또 얼마간 달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꼴찌였다.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여기서 걸음을 멈추면 포기해 버릴 것 같아, 느려도 계속 뛰었다. 그때 내 옆에 한 할아버지가 계셨다. 마르고 단단한 체구에, 몇 차례 마라톤을 뛰어본 듯한 분. 나는 그분이 내 속도에 발을 맞춰 함께 달려주고 있다는 걸 느꼈다. 우린 함께 꼴찌로 하프마라톤을 완주했다.


그날 이후 나는 무릎 부상을 입어 한 달 가까이 정형외과를 다녀야 했고, 걷기도 어려웠다. 그 후 마라톤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날 나를 응원해 준 시민들과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준 그 할아버지에 대한 감사함은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새로운 길을 걸으며 든 생각

새로운 길을 걷는 중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또 다른 삶을 시작했다. 대학 4학년 시절, 면접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던 막막함이 다시 떠올랐다. 도대체 어떻게 회사를 가야 하는지, 어느 분야로 뛰어들어야 하는지, 어떤 커리어를 쌓아야 할지 전혀 감이 없던 그때처럼.


물론, 지금은 사회 경험이 쌓였기에 그 시절만큼의 막막함은 없다. 그러나 두려움의 본질은 여전히 비슷하다. 어릴 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무서웠다면, 지금은 알아버렸기에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불안이 찾아온다.


그 시절엔 친구들과 같은 처지였기에 서로를 쉽게 위로하고 응원할 수 있었다. '나도 힘든데, 쟤는 얼마나 힘들까?' 하는 마음. 하지만 나이가 들고, 각자의 길로 흩어지다 보니 지금의 새로운 시도는 홀로 감당할 몫이 커졌다.

다른 길로 향한다는 건, 생각보다 외로운 일이다. 그 외로움의 정체는, 아마도 응원을 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회사 다닐 때, 내 감정의 기본값은 경증 우울에 가까웠다. 사무실에서 동료와의 시시한 얘기도 애써 웃어야만 하는 것이었고, 회식이나 술자리는 빠져나갈 궁리가 필요한 과제와도 같았다. 나와 맞지 않는 환경에서 버티는 동안 힘이 되었던 건 가까운 사람들의 위로였다. 어렵게 쌓아 올린 탑을 포기할지 말지를 고민하던 내게 따뜻한 말을 건네준 이들이 있었다. 그 다정함에 힘을 냈다.


그래서 결국, 주변의 위로를 안고 나는 내가 원하는 길을 선택했다.


새로운 길은 분명 행복하지만, 그 안에서도 문득 응원이 고픈 순간이 있다. 그런데 막상 새로운 길을 걷고 있자니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어떻게 가고 있는지 묻는 사람이 없다. 한순간 길이 막막하고 겁이 날 때면, 누군가의 "넌 잘할 수 있어"라는 말이 간절해진다. 응원의 부재는 서운함으로 다가왔고, 동시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 과연 누구를 응원한 적이 있었던가?


위로는 수동적인 응원일지도

위로는 어쩌면, 멈춰 선 자리에서 함께 주저앉아주는 수동적인 응원일지도 모른다. 반면, 응원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 등을 밀어주는 일이다. 뒤에서 조용히 손을 잡아주고, 앞으로 걸음을 옮기도록 북돋아주는 힘. 그래서 우리는 위로는 자주 건네지만, 응원은 쉽게 건네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위로는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는 데서 시작되고, 응원은 그 사람의 가능성을 믿는 데서 출발한다. 위로는 귀 기울여주는 마음이면 충분하지만, 응원은 믿음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가 새로운 시작을 할 때, 나는 진심으로 응원한 적이 있었을까. 위로는 해도, 응원은 선뜻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이 그만큼 넓고 깊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청첩장에서 자주 보는 문장이 있다. “미래를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친구나 연인이 아닌, 인생의 동반자로 누군가를 택한다는 건, 그 사람의 미래를 믿는다는 뜻이다. 어쩌면 응원이란, 배우자만큼이나 소중한 누군가에게 드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족에게서조차 받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응원을 듣고 싶은데?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응원'은 '운동 경기 등에서, 선수가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로 정의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파이팅’도 90년대 스포츠 응원문화에서 비롯된 콩글리시다. 그래서 나는 힘들 때 '파이팅'이란 말을 들으면, 오히려 에너지를 강요받는 기분이 들기도 해서 썩 탐탁지가 않다. 경기에서의 승리를 조건으로 하는 말 같달까.


그래서 나는 조건 없는, 한국어로는 지지, 영어로는 'support'라는 단어가 좋다. 미드를 보면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I'll support you no matter what.”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상황에 있든, 변함없이 지지하겠다는 말이 진심이 가득한 응원의 말이 아닐까. 마라톤을 중간에 포기해도, 끝까지 완주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힘.

이 말을 나 스스로에게도, 누군가에게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삶이라는 긴 마라톤에서, 우리가 서로의 페이스메이커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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