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사장님."
"여기 00 부동산인데요, 혹시 오늘 저녁 6시 30분에 집 보러 가도 될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5분쯤 지났나, 다시 전화가 온다.
"네, 사장님."
"내일 낮 12시에도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괜찮을까요?"
"네, 알겠습니다."
요즘 내가 제일 전화받기 싫어하는 사람은 부동산 아줌마다. 다음 주에 이사를 가는데 이 전셋집이 아직도 안 팔렸다. 처음 사람들이 집을 보러 온 건 12월이었다. 3개월 동안 얼핏 25팀 정도가 이 집을 보고 갔지만 깜깜무소식이다.
이 집은 나와 남편의 첫 전셋집이다. 3년 전 처음 전셋집을 구할 당시 부동산 시장이 좋지 않았다. 전세 매물은 부족했고, 전셋값도 전년 대비 크게 오른 상태였다. 나와 남편이 가진 돈은 정해져 있으니, 악조건 속에서 나름 고르고 골라 선택한 곳이 이 집이었다. 2년 계약으로 왔지만, 2년을 다 채워갈 즈음엔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이사 비용도 부담스러워 그냥 1년을 어찌어찌 더 비볐다.
그래서 계약 만료 3개월 전인 작년 11월에 집주인에게 계약 종료 의사를 밝히고, 12월에 발품을 팔아 마침내 이사 갈 곳을 구했다. 어쨌든 지금 사는 집이 빨리 나가야 임대인, 임차인의 금전적 관계를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이사를 갈 수 있기에 처음엔 집이 잘 팔리도록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집이 안 팔릴 줄이야.
사실 집이 이렇게 안 나갈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3년 전 내가 이 집을 골랐던 건 당시 내가 봤던 이 아파트 단지 중에서도 꽤 괜찮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경기도 일산에 있는 이 아파트는 2개의 노선이 다니는 전철역까지 5분 거리인 초역세권인 데다가 주변에 버스 정류장도 많아 직장인이 서울로 통근하기에 편리하다. 또 주변에 크게 조성된 공원이 많고 10분 거리에 있는 학원가에는 다양한 먹거리가 있어 살기 좋은 곳이다. 경기도 전셋값은 서울에 비해 낮기에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예산이 빠듯한 신혼부부가 머물기 괜찮은 조건이다.
초반엔 사람들이 집을 보러 온다고 하면 집이 좀 더 괜찮게 보일 수 있도록 신발장에서부터 베란다까지 꼼꼼히 청소했다. 3년 전 내가 봤던 그때보다 우리 부부의 손을 탔으니 그만큼 낡았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주방은 설거지는 물론 물때부터 가스레인지까지 꼼꼼히 닦았고 화장실은 혹시 빨간 곰팡이가 보이지 않은 지, 머리카락이 들러붙어 있지는 않은지, 냄새가 나지는 않는지를 살펴봤다. 작년 생일에 선물 받은 비싼 향수 브랜드의 화장실용 방향제를 이때 처음 썼다. 조금이라도 집을 넓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 손님이 오기 10분 전엔 거실에 놓아둔 테이블을 치워놓기도 했다.
이 집을 나의 보금자리라고 여겼을 땐, 온 방이며 거실에 책이며 온갖 자료를 늘어놓았지만, 이제는 팔아야 할 물건이라는 생각이 드니 10년간 본업이었던 마케터의 모먼트가 발휘되면서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그런데 집이 안 팔리니 마치 내 선에서는 준비가 다 됐는데 유관부서의 비협조와 윗선의 변덕으로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 프로젝트처럼 짜증이 밀려오는 것이다. 3개월을 이러고 있으니 요즘에는 그때 이 집을 골랐던 내가 병신이었나 싶은 생각까지 다다랐다.
게다가 나는 집을 구하는 사람과 부동산, 그리고 임차인인 나 사이에 오가는 애매한 관행과 불분명한 비즈니스 매너에 슬슬 질리고 있었다. 집을 보러 오기로 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나는 부동산 사장님과 곱절이나 되는 전화를 주고받아야 했다. 나는 원래 휴대폰을 자주 확인하지 않는 사람이다. 직장인 시절에야 화장실에서도 휴대폰을 손에 쥐고 살았지만, 집에 돌아오면 한쪽에 던져두고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전화벨이나 카톡 알림음이 마치 불쑥 울리는 초인종처럼 느껴져 웬만하면 무음이나 진동으로 해두곤 했다. 불필요한 통화를 피하고 싶어 처음부터 시간을 조율할 통화를 줄이고자 집을 보러 오겠다는 사람들이 희망하는 시간에 웬만하면 다 맞춰주었다. 그러니 내 앞장에서는, 원하는 대로 다 해줬는데 10분 이상 늦는 비매너를 시전 하니 열이 받는 것이다. 그것도 한 두번도 아니고!
더 황당한 건 약속한 시간 1시간 전에 갑자기 취소하는 개념 없는 인간들이다. 그럴 때마다 출근길 지옥철에서 인류애를 잃어버렸던 순간들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지치는 만큼 부동산 사장님도 상당히 피곤했을 것이다. 사장님은 이 아파트 단지의 매매를 도맡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장님, 처음에 이 집은 금방 나갈 거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호언장담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난번엔 부동산 사장님께 외출 일정으로 다른 시간으로 조정해 달라 말씀드렸더니, 내게 서로 편하게 집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협조를 부탁한다며 문자를 보내왔다. 나 역시 작년 12월 내내 집을 구하러 여러 부동산을 다니고 집을 살펴봤지만, 어떤 집도 부동산에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 부동산 사장님들이 말하길, 요즘엔 임차인이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것을 꺼리기에 미리 약속을 잡아야 집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나 역시 모두 약속시간을 조율했고, 그 시간에 맞춰 방문했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
우리 집 거실에 있는 스마트 TV가 내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하루는 유튜브 피드에 한 유튜버가 외국에서 1년간 살 집을 구하는 영상이 떠서 우연히 보게 됐다. 그곳에서는 집을 보겠다고 하면 정해진 시간과 함께 집을 볼 수 있는 시간 단 10분을 제공한다. 그리고 만약 약속 시간에 늦으면 집을 볼 수 없다고 단호하게 안내한다. 늦는 것도 늦는 거지만, 약속시간 30분 전에 전화를 해서 일찍 도착했으니 지금 보러 가도 되냐고 묻는 것도 질린다. 거, 다 사람이 하는 건데 너무 인정머리 없이 빡빡하게 구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부동산 거래만큼 중요한 일에 상호 간의 존중과 신뢰는 기본이 아니냐고.
이러는 와중에 이사 가는 날짜와 계약금을 돌려받는 것에 대해 집주인 아저씨와 한차례 실랑이를 했다. 좋게 좋게 하려고 애썼지만 조율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입장이 충돌했다. 머리로는 이 시스템을 이해하면서도 계약이 끝나도 내 돈을 돌려받는 일이 이렇게 힘이 들어야 하나 싶어 화딱지가 난다. "더러워서 집을 사고 말지!"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하지만 요즘 서울에 있는 아파트 값이 최소 10~12억이니, 그저 충동적으로 나온 허세발언에 불과하다. 어렸을 적 소개팅할 때 상대가 맘에 들지 않거나 엉뚱한 소리를 해대면 그냥 내가 밥값을 내버렸다. 밥을 사줬으니 내게 연락이나 여지를 기대하지 말고 각자 갈 길 가자는 뜻이다. 그런데 집 문제 앞에선 그렇게 쿨하게 안되고 이렇게 찌질하게 화만 낸다.
내일도 집을 보러 오기로 했다. 어쨌든 손님이 올 때마다 집을 치우긴 하니까 마지막까지 깨끗하게 이 집에 머물다 가는 것으로 좋게 생각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