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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나의 나무 Feb 23. 2024

Ep.10 슬픔의 알고리즘

내 할머니, 당신의 할머니, 이 세상의 모든 할머니


슬픔의 알고리즘은 상실한 이를 여기저기로 이끌고 다닌다. 맨 처음에는 상실로 인해 느끼는 오만 가지 감정에 대해 확신이 필요했다. 슬퍼서 화가 나고 헛헛해서 애끓고 믿어지지 않아서 절망하는 하루하루의 반복이 과연 보편적인 반응인지 알고 싶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을 온, 오프라인에서 찾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아니, 그들에게만 공감하고 그들의 말만 들리고 보였다. 책을 탐독하고 팟캐스트와 유튜브를 찾아 들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교수, 심리상담가, 유족들의 자조모임.


관심은 이해할 수 없었던 장례문화로 옮겨갔다. 이게 맞아? 수없이 되묻고 진단했던 대목을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파고들었다. 초등학교에서 전학을 갈 때에도 친구와 선생님을 못 본다고 아쉬워하며 몇 날 며칠 작별인사를 나누는데, 연인과 헤어질래도 한 번쯤 뒤돌아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는데, 평생을 함께 한 가족이자 분신을 떠나보내는데 이렇게 생이별하듯 시신을 빼앗기는 게 이상한 것 아냐? 입관 때 15분 남짓, 화장터에서 천으로 싼 관이 사라지는 짧은 장면을 보여준 뒤 발을 내리는 게 맞아? 묻고 또 물었다.


그러고 난 뒤 상실 후 해결되지 않은, 슬픔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장면으로 수없이 되감았다. 미처 표출하지 못한 분노를 꺼내고 함께 눈물 흘려준 이에게 아직 전하지 못한 고마움을 전했다. 거실에 쌓아둔 유품 상자를 열어 할머니의 손 편지를 다시 읽고, 할머니의 글씨로 쓴 귀여운 부채와 내가 선물해 드린 크고 작은 소지품을 어루만지고, 그 작은 발이 부은 뒤 신었던 양말 꾸러미를 꺼내 내 발에 신어 본다. 내 휴대폰과 외장하드에 저장된 할머니 영상과 음성은 수없이 듣는데, 이상하게 할머니의 젊은 시절이 담긴 앨범은 아직 열어볼 엄두가 나지를 않는다. 할머니의 부재를 인정하는 행위가 겁이 나는 까닭이다.



당신의 할머니, 이 세상의 모든 할머니



알고리즘이 그다음으로 데려간 건 바로 누군가의 할머니 이야기.

‘할머니’

검색어를 넣자 숱한 글이 주렁주렁 달려 올라왔다. 우리를 낳아 키운 부모님 세대에는 맞벌이가 당연했던 까닭일까. MZ세대로 보이는 여러 작가들은 자신의 기록에 할머니와의 추억을 한 조각쯤 담았다.


할머니들의 말투, 생김새, 그분들께서 걸어오신 삶의 여정은 모두 다르다. 그럼에도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감상이 있다. 넘치는 사랑, 그리고 위대함. 사전에서 할머니를 찾으면 그저 ‘나이 든 여성’ 정도로 정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전적 의미를 넘어, 할머니라는 존재가 지니는 정신적 의미를 헤아려 본다면 어떨까.


삼십 대에게, 할머니라는 존재는 적어도 여든 해, 혹은 아흔 해 이상의 세월을 사신 분이다. 내 할머니는 1929년에 한국 땅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으며 말을 빼앗기고 일본어와 피난민의 삶을 몸소 익히셨다. 나와 내 또래가 부모 세대보다 소망 없는 시절을 살아간다지만, 어찌 초토화된 전쟁의 상흔과 밤낮 터지는 총소리, 분단의 아픔, 그럼에도 살아내야 하는 삶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을까. 우리의 할머니들은 삶이 던져주는 도전과 어려움을 굽이굽이 지나면서도 꿋꿋하게 인생을 살아낸 여전사들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부르는 할머니에겐 자손이 있다. 자식을 낳아 키우시고도 황혼 녘엔 손주를 키우거나 돌보셨다. 평생 눈으로 보고 몸으로 맞닥뜨리며 머리에 담아 가슴으로 푹 고아낸 지혜를 손주들에게 하나둘씩 풀어내신다. 아직 철없고 삶의 진리를 깨우치지 못한 손주의 머리에 쥐가 나지 않도록, 눈높이에 맞춰 차근차근, 채근하지 않고 잘 타이르는 말투로, 그리고 쉽게, 귀가 열려있는 가장 좋은 타이밍에.



내 할머니가 남기고 간 선물 같은 모습들



내 할머니 이야기라면 여기에 수백 가지 의미를 더할 수 있다. 내게 유전자를 물려주고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부어 주셨을 뿐 아니라 둘도 없는 내 친구이자 스승이었기에 그 특별함에는 설명을 보탤 필요가 없을 테다.


내 할머니는 지혜롭다. 경우에 맞는 말과 행동을 내게 가르치셨다. 크고 작은 지출을 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결정해야 하는지, 젊은 시절 수없이 흥하고 망했던 경험을 통해 일러주셨다. 자손들을 대할 때에는 각자의 성격과 사정을 헤아려 그에 맞게 대하셨다. 이를테면 나에겐 요양원에서 겪는 불편을 토로하셨다. 해결해 줄 수 있는 손녀를 찾으신 거다. 힘을 써야 하는 일이 있을 땐 손자에게 전화를 거셨다. 요양원에선 매일 만나는 직원들에게 얼굴을 비비며 손을 꼭 잡아주셨고 할머니께 드린 간식은 모두 나눠주셨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할머니를 힘들게 했던 요양원 직원 A를 대하실 때에도 자신을 이모처럼 따르던 요양보호사님을 대하듯 똑같이 먹을 것을 나누셨다. 할머니에게만 드리려고 어렵게 구한 ‘장인약과’를 보고 A가 입맛을 다시며 지나가자 “하나 줘라” 하셨다.


강여사님은 귀엽다. ‘망구’라고 버릇없이 불러도 곧잘 대답하시던 친구 같은 할머니는 별명만 스무 개쯤 있었다. 때로 내 걱정을 너무 하셔서 ‘강 걱정 할머니’라고 부르면 ‘에이그, 아니야~’ 하셨고, 내가 사드린 그림책을 멋들어지게 색칠하셔서 ‘강 화백님’ 하고 부르면 ‘오야~ 그거 좋다’ 하고 웃으셨다. 스마트폰을 배우겠다고 떼를 쓰셔서 사드리자 영상통화를 하며 그리도 좋아하시기에 친구들에게 자랑했더니 ‘MZ할머니’로 불리셨다. 코로나19 끝자락 어느 날이었던가. 토요일, 면회 온 손자와 외출을 나가 머리를 하고 오셨는데 염색이 너무 까맣게 돼 속상하다고 전화하신 일이 있다. 멋쩍게 웃으며 “너무 까맣게 됐어”하고 칭얼대는 목소리가 너무도 귀여워 놓치지 않고 녹음을 해뒀는데, 요즘 그 통화를 몇 번이고 다시 듣는다.


할머니는 멋있다. 젊어서부터 연세가 지긋해진 뒤에도 감각이 어찌나 좋으신지, 일요일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패셔니스타로 변신해 교회로 향하셨다. 벤슨 분의 ‘In the stars’ 가사처럼, 할머니는 갈 곳이 교회뿐인 데도 마치 자신이 슈퍼스타라도 되시는 듯 한껏 꾸미고 외출하셨다. 나는 지난해부터 할머니 옷을 하나씩 물려받아 이른바 ‘올드머니룩을 구사하고 있다. 지난가을 해외 출장 때 의상실 라벨이 붙은 할머니 재킷을 입고 갔는데 누군가 배우 오윤아 씨가 입은 것과 비슷하다며 사진을 찾아 보여줬다. 어릴 적엔 할머니의 안목 덕분에 예쁜 옷을 원 없이 입었다. 유아복을 만드시던 큰엄마 큰아빠가 샘플을 만들어 오시면 할머니는 그중에서 가장 빼어난 옷만 골라 내게 입히셨다. 유아복 모델을 하며 자란 덕분인지 옷이 그리 많지 않은데도 패션감각이 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강 권사님은 대쪽 같다. 그 신앙을 나는 좇고 싶다. 교회에 오래 다니며 굳어진 편향된 사고가 아니라, 창조자에 대한 믿음과 확신, 깊은 이해가 할머니께 있다. 나는 그걸 헤아리려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웜홀이니 영화 매트릭스니 하는 것들에 빗대 상상력을 펼쳐야 천지창조와 섭리를 어렴풋이 그리게 되는데,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려 할머니께 전화를 드리면 삶으로 체험한 일상의 기적들을 담담히 증언하셨다. 신앙이 익어가는 데에는 꼭 신비주의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겉가죽이 닳고 바란 할머니의 성경책은 내가 10년 넘게 공부한 법대교과서보다 손때가 많이 묻어있다. 마치 물리공식 하나 외우지 않고 물리시험에서 100점을 받고 싶다고 우기는 학생 같은 나를 부끄럽게 한다.


할머니는 인자하시다. 할머니 가슴속에는 사랑이 끝없이 샘솟는 옹달샘이라도 있는지, 당신이 아는 모든 이들에게 커다란 양동이로 퍼올린 애정을 흠뻑 뿌려주셨다. 상대방을 향한 관심에서 우러난 그 표현에, 감동하지 않고 배길 사람은 없었다. 거동이 불편해지신 뒤로도 할머니는 고마운 이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고 거듭 인사를 전하셨고, 슬퍼하는 이에겐 마음으로 위로를 전하셨다. 투덜대는 막내고모의 말투 이면에 어떤 아픔이 남아있는지 간파하고 토닥이셨고, 감성보다 이성적 사고가 강한 ‘뚝딱이’ 엄마의 서툰 표현법을 이해하고 고마워하셨다. 장남을 대신해 서른 해 넘게 자신을 모신 내 아버지에겐 ‘사랑하는 내 아들, 엄마가 미안하다’고 쓰셨다. 일찍 약을 쓴 덕분에 20년 넘게 치매가 더디게 진전됐다지만, 통 기억이 나지 않고 글씨만 쓰려면 머리가 ‘으리으리해진다’는 할머니는 틀린 글자를 몇 번이고 그어가며 삐뚤빼뚤 아들에게 마음을 적으셨다. 오래 사셔서 짐이 됐다고 여기셨다.


내 꿈은 할머니처럼 멋진 인생을 사는 거다. 할머니 인생의 일부만 적었는데도 그 꿈이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금 실감한다. 다음 알고리즘은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갈까. 침대맡에 눈물로 번진 메모장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할머니께서 하늘나라에서 흐뭇하게 바라보실 수 있도록, 그렇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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