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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나의 나무 Feb 26. 2024

Ep.11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보내는 시그널

꿈, 빗소리, 바람, 그리고...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웜홀을 지나는 주인공이 접힌 시공간 사이로 손을 뻗는 장면이 나온다. 과거 그가 보았던 실루엣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손이었던 것. 딸보다 먼저 미래에 도착한 과학자 아버지는 자신의 서재에서 책을 떨어트리는 신호로 시공간을 초월해 딸과 소통한다. 상상력이 너무도 풍부한 나는 어려서부터 비슷한 상상을 수없이 했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그때보다 세상을 아는 지식이 한 뼘 정도 넓어졌다는 것. 그래서 터무니없는 상상에 나름의 근거를 갖다 붙일 수 있게 됐다는 것.


길지 않은 인생에서 비슷한 경험을 두 번쯤 했다. 어릴 때부터 고요한 새벽 시간을 무척 좋아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며 할머니를 따라 교회 가는 길이 그리도 좋았다. 모두 자고 있는 시간에 나는 창조주와 비밀스럽게 대면하러 간다는 생각에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차츰 나이를 먹고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 갈 즈음 나의 기도는 의문 부호로 가득 찼다. 아침 기상은 즐거움보다 간절함에 가까워졌다. 아침에 일어나야만 할 이유가 생겼다. 그조차 자신이 없어 ‘내 기도를 들어주실 거라면 먼저 나를 깨워달라’는 얼토당토않은 기도를 하고 잠이 들었다.


따르릉-


인터폰이 울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수화기를 들자 신호음만 들렸다. 시계를 확인하니 4시 30분이었다. 경비 아저씨가 그 시간에 웨이크업 콜을 해 주셨을 리는 없다. 차원을 넘나드는 그분께서 내 눈높이에 맞게 전화를 걸어 주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일어나서 잠잠히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렴.” 하고 깨웠을 것만 같다. 신기한 건 세월이 지나도 두꺼운 옷으로 꽁꽁 싸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새벽 4시 30분의 그 길은 언제나 아홉 살 소녀가 길을 걷는 기분이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옆에는 내 할머니가 계신 듯.


때로는 이런 과대망상에도 빠진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내 힘으로 되지 않는 일은 순리가 아닌 거라고. 그저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인생의 끝자락을 보고 온 내가 그걸 모르는 현재의 나에게 속삭인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평행우주를 다녀본 4차원의 내가 수만 가지의 결말을 두루 살펴보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이 나를 가장 나답게 하고 내 영혼을 풍요롭게 하고 그래서 인생이 아름다운 것을 느끼기 좋은 여건이자 속도라고. 지금, 인생에서 처음 마주하는 가장 깊고 끝 모르는 슬픔을 다루기 위해 나는 평생에 걸쳐 배운 지식과 경험들, 그리고 상상과 감각까지 몽땅 길어 올리고 있다.



꿈, 빗소리, 바람



아픈 할머니를 안고 업고 차를 몰고 병원으로 달려가는데 칼바람이 몰아쳤다. 빨리 병원에 가야만 한다는 일념 탓에 그만 할머니가 추위에 떨고 계신 걸 알아채지 못했다. 자신을 등에 업고 눈보라를 맞으며 힘겹게 달리는 내게 차마 춥다고는 말씀하시지 못한 할머니는 바람이 되어 날아갔고, 죽어라 달리던 나는 할머니의 체중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순간 손바닥에 남은 할머니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며 목 놓아 울었다.


곧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길로 가족들에게 달려갔다. 할머니가 바람이 되었다고. 거실에 둔 호랑이 털모자를 씌워드렸으면 덜 추웠을 텐데 내 생각이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고. 울부짖으며 자책했다. 눈을 뜨니 여명이었다.


창밖으로 흐린 하늘 속 빛이 밝아 한 여섯 시쯤 됐나 하고 보니 새벽 4시 40분이었다. 새벽녘에 비가 내린 모양이다. 회사에서 단독 기사를 내거는 시간에 하필 깨다니, 이것도 직업병인가. 아니면 아홉 살 때부터 맞춰진 바이오리듬 탓일까. 좀 더 잠을 청했지만 쉽사리 다시 잠에 들지는 않았다. 보통 잠에서 깨며 기억의 저편으로 물러나는 수면 중 뇌의 활동은 그날따라 너무도 생생했다. ‘이 꿈이 의미하는 건 뭘까.’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훔치고 젖은 베개를 돌려 벴다. 잠을 보충한 뒤엔 늦잠이 돼있었다.


외출 준비로 분주했지만,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지난주 일할 땐 전화를 하지 마시라고 하도 난리를 친 탓에 목소리를 듣고 싶어도 전화를 못했노라며 반가워하셨다. 죄송했다. 그깟 일 뭐 그리 중하다고, 삶의 우선순위를 제쳐두었을까. 할머니는 배변 실수가 늘었다며 걱정하셨다. 나는 원체 할머니한테는 무엇이든 관대한 데다, 꿈에 할머니를 바람으로 날려 보낸 터이기에 그깟 배변 실수쯤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며 위로했다.


“좋은 소식 없냐.”


후렴구처럼 반복하시는 할머니의 인사말에 오늘만큼은 좀 더 활기차게 답을 했다. 성씨가 뭔지, 나이는 몇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늘 그렇듯 할머니의 애정 어린 호구조사는 자세하고 전문적이다. 라고, 2022년 6월 6일 오전 10시 9분 꿈을 담은 일기를 적으며 나는 ‘이 역시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보내는 시그널이 아닐까’ 생각했다.


동화처럼 간단한 서사. 장면마다 내가 느낀 감정들은 너무도 선명했다. 미래의 내가, 그러니까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현재의 내가 1년여 전부터 과거의 나에게 보낸 시그널은 아니었을까. 내가 아니라면 내 할머니가, 나에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라고 꿈을 불어넣어 주신 건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1년이 채 못 된 2023년 3월 13일 아침, 나는 요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혼이 나간 듯 달려가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다. 힘 없이 스러져가던 할머니는 내 목소리에 반응하지 못하셨다. 손을 쓰다듬고 꼭 붙잡아도, 온화하게 눈을 감고 입꼬리만 살짝 올릴 뿐 불러도 대답이 없으셨다. 내가 누군지, 열 번쯤 물었지만 “네~ 그래요” 하고 노래하듯 웅얼거렸고, 눈을 겨우 뜨시더니 “우리 이쁜이” 하고 다시 눈을 감으셨다.


응급실에 따라 들어갔다. 혈액검사를 하고 CT와 MRI, 폐 Xray까지 찍었는데 모두 정상. 뇌출혈이나 뇌졸중도 아니고 염증도 없으시단다. 놀란 가슴을 겨우 쓸어내렸다. 의료진에겐 성함을 겨우 말씀하시고 식사하실 때도 힘이 없으시더니 이른 저녁부턴 막 잠에서 깨어나신 듯 가족들 근황을 열심히 취재하셨고 요양원 도난 의혹(?)도 풀어놓으셨다. 기운을 차리신 거다. 응급실로 향하면서부터 어찌나 울었는지 긴장이 풀리자 몹시도 허기졌다.


이렇듯 몇 번의 충격요법이 있었지만 할머니 이야기라면 무르고 해지는 내 마음이 단단해질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돌아보면 할머니가 증발하는 꿈은 할머니의 장례식을 미리 보여 준 예고편 같다. 살아 계실 때 틈틈이 내게 잠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건 당신의 마지막 모습이 마음껏 유언하실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어렴풋이 내다보시고 자신도 모르게 내게 여러 차례 나눠 전하신 할머니의 배려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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