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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나의 나무 Feb 21. 2024

Ep.9 백만 송이 장미를 피웠습니다

상실에서 감사로, 슬픔을 건너다

할머니께서는 나문희 선생님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내가 어릴 적, 할머니와 나는 평일 저녁 8시 30분이면 TV 앞에 바짝 붙어 앉아 KBS 드라마 ‘바람은 불어도’를 본방 사수했다. 워낙 오래전이라 에피소드를 세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집에서 두고두고 회자된 한 장면이 있다. 극 중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은 나문희 선생님은 두 손바닥으로 땅을 치며 털썩 주저앉아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고는 신발 한 짝을 벗어던진다. 아마도 고함을 치며 아이처럼 우는 장면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와 엄마는 그 장면에 고개를 젖히고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하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극 중에서 할머니 역할을 하신 나문희 선생님은 당시 연세가 쉰넷에 불과하셨다.


이 드라마를 함께 보며 여자 셋과 남자 둘은 울고 웃었다. 거실은 식구들이 함께 모여 저녁을 먹고 TV 드라마와 뉴스를 보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소였다. 대화 주제는 주로 학교에서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 그날의 뉴스와 개그 콘서트의 에피소드, 나문희 선생님. 지금처럼 각자 방에 들어 누워 휴대폰을 끼고 OTT로 입맛에 맞는 콘텐츠를 보는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당연하게만 여겼던 그 시절, 할머니를 모시고 온 가족이 한 데 모여 보낸 오붓한 시간들은 내가 자라는 동안 따스한 자양분이 되었다. 사랑을 주는 편이 더 편안한 건 할머니와 부모님이 몸소 보여주신 삶의 태도가 내게도 스며든 덕분일 거다.


 

순수한 사랑…백만 송이 장미 피웠죠



최근 나문희 선생님의 사연을 접했다. 가수 임영웅 씨의 콘서트에서 선생님의 사연이 소개됐다는 기사를 통해서다. 할머니께서 생을 마감하신 시기, 선생님도 남편을 떠나보내셨다고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생의 끝이 언제인지 모르는 까닭에 그의 마지막을 놓치지 않고 지키는 건 불가능하다. 인터뷰에서 눈길이 멈춘 대목은 바로 여기다.


그는 “영화 찍을 때  ‘여보, 사랑해’ 하고 잠들었다. 그런데 영화 갔다 와서 보니까 상황이 너무 나빠졌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영감님이 나한테 사랑할 시간을 줬다. 영화 촬영이 끝나고 우리 영감님과 보낼 시간이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때를 떠올리던 나문희는  ‘백만 송이 장미’의 가사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를 언급했다. “백만 송이 장미가 미워하는 마음 없이 순수하게 사랑을 할 때 피어나는 듯하다. 나는 그런 꽃을 피워봤던 것 같다”는 나문희의 목소리에서는 애정이 느껴졌다.

기사 본문 읽기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20815590003719



노랫말에는 묘한 힘이 있다. 처음엔 귓가를 간질이는 멜로디가 마음에 들어 선율을 따라 콧노래를 부르다 보면 어느새 가사를 곱씹게 된다. 지난해 가을부터였나. 거리를 걷다 들었는지, 라디오 채널을 돌리다 들었는지, 종일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BTS와 블랙핑크도 아니고 분명 MZ세대가 널리 즐길 유행가는 아닌데, 나는 이 노래가 좋았다. 몇 번 부르다 보니 가사가 이렇게나 아름다웠나하고 놀랐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상실로 인한 슬픔을 우려내면서도 감사할 수 있는 건, 그 상실이 앗아간 행복이 특별한 선물이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하는 경험을 나는 해 봤다.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면 “나는 그런 꽃을 피워봤다.” 할머니께서도 내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며 행복하셨음을, 백만 송이 장미를 피우셨음을 나는 안다. 그건 일생을 살며 누릴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선물이다. 그래서 상실 앞에 감사하다.




슬픔의 과정, 어디쯤 걷고 있나요

홍승연 작가의 ≪슬픔을 건너다≫의 표현처럼, 슬픔은 극복하고 이겨내는 게 아니다. ‘건너는’ 게 맞다.


존 볼비의 단계별 애도 이론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은 크게 네 단계를 거친다. 


① 충격.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하거나 분노를 표출하고 망연자실해지거나 넋이 나간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장례식 이후 두 달 가까이 이 단계에 머물렀다. 

② 그리움. 상실을 어느 정도 수용했으나 여전히 고인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며칠이고 할머니 생각을 하며 머물 수 있을 것만 같고, 닿을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한다. 그리고 이따금씩 추억에 푹 젖어있다.

③ 혼란, 그리고 절망. 사별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단계라고 한다. 무기력하고 만사가 귀찮아지는데, 첫 번째 과정으로 회귀한 것 같은 이유는 고인을 떠올리지만 이제 돌아올 수 없음을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④ 재조직.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일상을 회복하는 단계다. 이전에 느꼈던 긍정적 감정도 다시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두 달째 쓰고 있는 애도일기를 넘겨 보며 글의 온도가 처음보다는 조금 더 따뜻해졌음을 느낀다. 아마도 나는 슬픔의 과정 중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단계 어딘가를 지나고 있는 듯하다. 그리움은 아주 짙어져서 자꾸만 할머니를 부르게 된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불이 꺼진 집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할머니의 분홍색 옷자락을 만지며 “할머니, 나 왔어요.” 하고 말한다. 


물론 여전히 열어보지 못하는 눈물버튼이 집안 곳곳에 있다. 집안은 정리왕인 내가 평생 본 적 없는 상태인데 그걸 해결할 에너지가 내겐 아직 없다. 아침 수영을 다녀온 뒤 출근 전 시간을 조금만 부지런하게 활용하면 일주일이면 깨끗해질 텐데, 내 생각은 딱 거기에 머문다. 그러니까, 애도 이론에서 설명하는 과정이 실제의 삶에선 칼로 무 자르듯 선명하게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 여기 머물렀다 저기에도 머물고, 다시 돌아오기도 하는 그런 수용의 과정인 셈이다.



상실에서 감사로… 슬픔을 건너다


그런 의미에서 슬픔은 극복하는 것도 아니고, 이겨내는 것도 아니다. 슬픔은 ‘건너는’ 게 맞다. 글자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 스물한 장짜리 그림책 홍승연 작가의 ≪슬픔을 건너다≫는 눈물을 찍어내며 읽기 좋다. ‘희미한 작은 불빛 하나에 간절히 매달’려도 봤고 ‘홀로 견뎌야 하는 막막함이 너무 시리게 느껴지’는 건 피할 수 없는 순리다. 이 슬픔 속에서 다시는 나가지 못할 것만 같은 깊은 절망 역시 상실을 겪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감정이다. 슬픔은 곧 극복될 것이고 당신은 ‘그 이후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거야(happily Ever After)’로 비약하는 결론이 아니어서 공감할 수 있다.


(이토록 복잡다단한 주제를 그림으로 구성한 표현력에 감탄하며 이 작가 역시 상실을 겪었구나, 짐작했다. 작가는 책 맨 뒷 장에 ‘소중한 것들을 연이어 잃었던 기억을 바탕으로 이 책을 작업했고, 다시 작고 소중한 경험들을 모으며 살고 있습니다.’라고 적었다.)


나는 아직 건너야 할 여정이 남아있다. 불이 난 것처럼 뜨겁고 아팠던 매운맛이 입에서 가시듯 슬픔은 한순간에 상쾌한 감정으로 바뀌는 게 아니어서, 슬픔을 머금고 지내야 하는 시간이 얼마나 더 남아있을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적당한 가면을 쓰고 회사에 다니고 사람들을 만날 뿐이다. 다만, 사랑하는 존재에게 집중하느라 잊고 있던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내 삶은 상실 전과는 아주 달라진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가장 진한 나이테가 뼛속 어딘가에 새겨지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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