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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정 Oct 30. 2022

가로수를 보면 생각나는 평생 여우

내 친구 A


사람들은 이제 뭔가를 알 시간조차 없어지고 말았어. 사람들은 다 만들어놓은 물건들을 가게에서 사거든. 그렇지만 친구를 파는 장사꾼은 없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게 되었단다. 친구가 갖고 싶다면 나를 길들여줘!

- <어린왕자> 생떽쥐베리 저, 김&정



영화동아리 시절 나랑 A는 곧잘 붙어 다녔다. 그런 경우 흔히 그렇듯 주변에서 ‘그럴거면 차라리 둘이 사귀라’고 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 말에 대한 A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안 돼. 얘랑은 못 사겨. 평생친구해야 되거든.”


A의 그 대답 이후로 동아리 사람들은 우리를 볼 때마다 ‘평생친구’라며 놀려댔는데, 말의 힘이 무서운 건지… A의 선경지명이 무서운 건지… 그 선언 이후 20년이 넘도록 우리는 친구로 지내고 있다. 내 생각에 더 늙어도 A는 살아만 있다면 내 친구일 게 뻔해서 진짜 평생친구로 묘비에 쓰게 되는 건 아닐지… 기대 반 우려 반이다.


평생친구인 A와 나 사이에는 우리 우정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된 기념비 같은 나무가 수십, 아니 수백 그루 있다. 우리만큼이나 나이가 많아졌을 그 나무들의 밑동에는 우리가 대학생 시절 함께 박은 금속 인식표가 박혀있다. 가로수 밑동을 자세히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므로 그 인식표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당시 우리는 송파구청 녹지과에서 하루 5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꽤 좋은 조건의 일당을 받고 가로수에 인식표를 박았었다. 그 때는 둘 다 돈이 없어서 했던 일인데 덕분에 하루 종일 붙어서 떠들면서 송파구 일대를 걸어다닐 수 있었다. 돈이 없는 게 때로는 우정을 깊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또 몇 명이나 될까?


우정에 대해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긴 생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는 ‘길들인다’는 표현이 나온다. 서로가 서로에게 시간을 들여 길들이는 것. 그리하여 서로에게 둘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친구다. 그럼 점에서 A는 어린 왕자에게 나를 길들여달라고 말하던 여우를 닮았다. 혹은 내가 A에게 그 여우인지도 모르겠다. 금빛으로 흔들리는 밀밭을 보면 어린 왕자의 금발 머리칼을 떠올리는 여우처럼 나 역시 가로수를 보면 A와 함께 걷던 스무 살 시절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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