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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정 Oct 30. 2022

세상에서 가장 해맑은 로테

우리 엄마

그리하여 보기에도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로테는 한 팔을 쭉 뻗고서 빙빙 돌아갔다. ‘하나’ 하고 첫째 사람이 시작하니까 그 옆의 사람이 ‘둘’, ‘셋’ 하며 다음 사람으로 계속 넘어갔다. 그러다 한 친구가 잘못 세고 말았다. 찰싹! 하고 따귀가 한 대. 그것을 보고 웃는 동안에 다음 사람도 찰싹! 그리고 점점 속도가 빨라졌다. 나도 뺨을 두 대나 얻어맞았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뻤다.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 저, 민음사



우리 엄마는 상당히 귀여운 사람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귀여움으로 상위 1프로 이내에 들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우리 엄마니까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서 그럴 것이다. 당연하다. 가족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서로를 감싸기 마련이니까. 엄마는 여느 어머니들처럼 아주 말이 많다. 장황하고 두서 없지만 끝도 없는 전형적인 어머니 화법을 구사하신다. 그리고 또 상대방이 뭐라고 하든 굴하지 않고 끝없이 유머를 시도하시곤 한다.


기억이 잘 안나는데 방구와 관련된 옛날 유머가 있었다. 정말 너그러운 마음으로 들어도 어디서 웃어야 할 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장황한 이야기였는데, 그 이야기의 끝에는 늘 엄마의 큰 웃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오빠, 아빠는 헛기침을 할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는 자신의 유머에 자신이 큰 소리로 웃고는 또 항상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포인트 대사를 한 번 더 반복하며 다른 사람들도 웃어주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라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쯤 되면 집안에서 마음이 가장 약한 내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는 재미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저렇게까지 웃음을 갈구하는 엄마를 무시할 수 없기도 하고, 또 그러고 있는 모습 자체가 웃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는 엄마를 무서워했다. 할머니와 엄마는 사이가 나빴다. 할머니는 홀어머니 특유의 아들사랑과 또 굉장히 독특하고 강한 성격을 가진 분이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엄마를 꾸준히 싫어하셨다. 엄마 아빠 모두 회사에 나가셔서 할머니 손에 자란 나는 할머니의 눈으로 엄마를 봤다. 할머니 눈으로 본 엄마는 나쁜 것 투성이었다. 게다가 퇴근한 뒤 엄마는 그렇게 자신을 미워하는 시어머니와 함께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나에게 히스테리를 부리거나 때릴 때도 많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나는 엄마가 계모가 아닐까 혼자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엄마는 기분이 좋을 때는 한없이 좋아서 나를 항상 ‘공주’라고 불렀고, 팔베개를 해주고 노래도 많이 불러주셨다. 엄마는 노래를 굉장히 잘 하고 또 좋아해서 나는 항상 노래를 듣거나 부르는 엄마를 보고 있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엄마가 좋아했던 나나 무스꾸리나 탐 존스의 목소리가 함께 울려퍼지는 것만 같다.


엄마는 또 숨 쉬듯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린다든지, 부르면서 흘린다든지, 무슨 말을 하면서 운다든지 하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다. 우는 걸 부끄러워하거나 쑥스러워 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 나같은 사람은 나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거나 드러내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데 엄마는 그게 아무 노력없이 그냥 되는 사람이었다. 대학교 때 단편영화를 연출하면서 방문 전도를 하는 아줌마 역할을 엄마에게 시킨 적이 있는데 엄마는 연기도 잘 했다. 리허설 한 번만 하자는데 ‘그깟 거 하는데 무슨 리허설까지 하냐며’ 자신감이 넘치더니 정말 카메라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하셨다. 이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난 학창시절 여러 훈련을 거쳐서 연기를 한 적도 있지만 어떻게 해도 맘이 편하지 않았다. 당연히 연기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빨리 그만 뒀다.


엄마를 생각하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한 장면 속 로테가 떠오른다.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 천둥 번개가 심하게 치는데 로테는 사람들에게 뺨 때리기 게임을 하자고 한다. 사람들은 로테의 지도하에 게임을 하고 틀리면 뺨을 맞으며 즐거워한다. 나는 학창시절에 이 대목을 읽으면서 큰 소리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문화에서는 우선 뺨을 때리는 게임이 있을 수 없어서 너무 엉뚱한 장면 같았다. 그런데 그게 여주인공 로테의 매력을 보여주는 씬이라니! 나에게는 좀 많이 엉뚱하게 느껴지는 로테가 꼭 우리엄마같았다. 엄마하면 정말 저런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엉뚱한 농담이나 게임을 던지고 해맑게 웃을 테니까.


나는 이런 엄마를 무척 사랑하지만 솔직히 엄마랑 하루만 같이 있어도 비명을 지를 것만 같은 심정이 되고 만다. 정말 착하고 귀여운 사람이지만, 말이 많아도 너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엄마는 밖에 다니면서 사기도 잘 당해서 나를 수시로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엄마 쪽 할머니들은 대체로 장수하셨다. 엄마의 친할머니도 백 살 근처까지 사셨고, 외할머니도 백 살 넘게 사셨다. 엄마의 엄마, 즉 나의 외할머니도 지금 구십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청년 같으시다. 엄마도 건강하고 말이 많고 잘 웃고 잘 우는 귀여운 할머니로 잘 늙어가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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