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육촌 동생 K
하늘이 두 쪽 나도 이것 하나만은 바뀌지 않을 거야. 내가 만일 공주라면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걸쳤다고 해도 속마음은 공주처럼 될 수 있어. 금빛 찬란한 옷을 입으면 공주처럼 행동하기가 한결 쉽겠지만 아무도 몰라줄 때에도 한결같이 진짜 공주처럼 행동하는 게 훨씬 보람 있을 거야.
- <소공녀> 프란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웅진씽크빅
다섯 살 즈음이었던가.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보는 것마다 새롭던 시절, 나는 K를 처음 만났다. 그 때, 아직 비난이 많았던 내 사전에 K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아이’로 정의내려졌다. K의 엄마, 그러니까 나의 이모는 K를 ‘우리 무남독녀 외동딸 K야’라고 늘 부르셨다. 한 번만 그렇게 소개한 게 아니다. 부르시거나 남들에게 K를 지칭할 때조차 ‘우리 무남독녀 외동딸 K’라고 했던 것이다. 마치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첩갑자…’를 떠올리게 하는 긴 이름처럼 들리기도 했던 그 호칭은 K가 얼마나 귀한 아이인지를 어린 나에게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때는 사촌동생인 줄 알았던 K는 사실 육촌 동생이었고, 그걸 정확히 알게 되었을 무렵엔 나도, K도 키가 두 배는 커진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내가 외가가 있는 수원으로 전학가면서 나와 K는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난 K는 여전히 귀한 아이였다. 원래도 K만큼 귀하지 않던 나는 당시에 한 순간 모든 걸 다 잃은 아이가 되어있었다. K는 옷이 너무 많아 일 년 내내 다른 옷을 입어야 할 정도라 옷이 없는 나에게 한 보따리씩 주기도 했다. 내가 평소에 입던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스타일 운운할 처지가 아니었던 나는 다소 화려했던 K 옷을 입고 다녔었다. K네 집에는 반짝이는 것 투성이었다. 반짝이는 조명, 반짝이는 피아노, 반짝이는 그릇… 집도 아주 컸다. K는 하고 싶은 건 뭐든 하고, 하기 싫은 건 그게 뭐든 하지 않았다.
통닭을 튀겨서 목돈을 벌고, 그 돈으로 부동산을 차려서 더 큰 돈을 번 이모와 이모부는 아이들은 알 수 없는 어른들만의 이유로 갈라섰다. 귀한 아이 K의 운명에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게 아마도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혼 뒤 이모는 불현듯 뇌출혈로 돌아가셨고, 이모부도 슬픔 때문인지 술에 의존하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무슨 일인지 그 많던 돈도 사라져갔고 K는 고등학교 때 학교를 자퇴했다. 가세는 급격히 기울어 부족한 게 없던 공주였던 K는 기억 속에서만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현실 속 K는 이제 자신의 밥은 자신이 벌어먹어야 하는 아이였고, 남문에서 옷을 팔았다. 그렇게 옷 장사를 하면서 패션에 눈을 뜨고 꽤 큰 브랜드에서 남성복 팀장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스트레스 때문에 그만 두고 수비학을 기반으로 한다는 서양점을 보고 있다. K는 귀한 아이답게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하든 ‘공주의 기품’을 잃지 않았다. 마치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이 쓴 ‘소공녀’ 속 세라처럼.
고귀한 신분이었던 세라는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라는 자신의 고귀함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결국은 자신의 고귀함에 걸맞는 지위를 되찾게 된다. 나는 믿는다. K에게 닥친 여러 고난은 결국 K 자신의 귀함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다섯 살 시절에 내가 처음 봤던 그 ‘무남독녀 외동딸’, 귀하고 귀한 아이가 가졌던 모든 기쁨과 자부심과 행복까지 자신의 것으로 되찾게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