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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찬 Jun 27. 2024

P 인간의 하루에 J 강아지가 들어왔다

Part 1. 안락사 당일에 구조된 아이

점차 다솜이만의 규칙이 생기고 주장이 강해져 갈수록, 오히려 나는 안심했다. 이렇게 시간대별로 따르는 루틴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다솜이가 우리 집에 잘 적응하고 안정을 찾았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다솜이가 처음 집에 와서 잘 적응한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솜이가 적응을 하고 보니, 계획적인 루틴이 있는 강아지였어요.

저는 계획이 없는 스타일인데 말이죠!

다솜이가 얼마나 자신의 루틴을 지키며 하루를 보내는지, 생활계획표를 그려보았습니다 ㅎㅎ




MBTI가 P로 끝나는 나는 그다지 계획적이고 정돈된 사람이 아니다. 특히나 퇴사를 하고 프리랜서로 생활하다 보니 더욱 즉흥적이고 정리가 되지 않는 면이 두드러졌다. 이런 성향은 물건들이 널브러진 ‘공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꾸려가는 ‘일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다솜이를 임시보호하게 된 것이 철저히 계획된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결정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전부터 유기견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된다면 강아지를 키워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내가 MBTI가 J로 끝나는 강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J는 계획적인 성격이란 뜻으로, 다솜이가 바로 계획적인 성격의 강아지였다. 그리고 내가 겪어본 많은 J형 사람들이 그러하듯, 다솜이도 한 ‘깔끔’하는 강아지였다. (혹시나 강아지가 MBTI 검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아냐고 반문한다면, 그저 같이 살아보면 알 수 있다고 답할 수밖에.)


처음 집에 와서 적응하기까지는 다솜이의 이러한 성격을 잘 몰랐다. 다솜이도 긴장해서인지 원래 성격대로 행동하지 못했나 보다. 대부분의 시간을 구석진 자리에 틀어박혀서, 루틴이랄 게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느 날은 낮동안 잠만 자다가 새벽에 나와 깨작깨작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어느 날은 종일 몸을 웅크린 채 내가 뭐하는지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하듯 지켜보고, 뻔히 배변패드를 앞에 두고 바닥에 볼일을 보았다. 또 어느 날은 밥시간이 지나도록 전혀 밥을 먹지 않고 배변도 전혀 하지 않아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다.


다솜이의 진짜 성격은 집에 온 지 보름쯤 되어서야 서서히 드러났다. 우리 집이 자신의 영역임을 확실히 인지하고 같이 사는 사람들이 믿을만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게 그쯤일까. 다솜이는 자신의 영역을 깔끔하게 유지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나중엔 정확히 배변패드를 구분하고 어디에서든 패드만 깔아주면 알아서 볼일을 보게 되었지만, 처음엔 실수가 잦았다. 그럴 때면 다솜이는 자신의 실수로 더러워진 영역을 얼른 원상 복구하길 원했다. 주로 다솜이의 화장실 타임은 새벽에 이루어졌다. 새벽 3~4시쯤이 되면 어김없이 내 침대 밑에서 ‘헝’하고 인기척을 내고, 앞장서서 실수한 자리로 데리고 가서, 내가 실수의 흔적을 치울 때까지 곁을 지키곤 했다. 처음엔 나를 왜 깨우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거실로 따라나가면 언제나 배변한 흔적이 있고 그것을 치우는 걸 조용히 지켜보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구역을 깨끗이 청소하도록 일을 시키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 온전히 집 생활에 적응한 후에는 더 이상 새벽 배변을 하지 않고 통잠을 자게 되었다.



정착한 다솜이의 루틴은 다음과 같다.


오전 7시: 잠이 많은 다솜이는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작은 누나(동생)를 배웅하는 것쯤은 쿨하게 건너뛴다.

오전 9시: 배꼽시계의 알람으로 눈을 뜨고 큰누나(나)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도저히 안될 때는 온몸을 던져 누나를 깨운다.

오전 10시: 누나보다 빨리 아침을 든든하게 챙겨 먹고, 누나 옆에 착 달라붙어 사과를 나눠 먹는다. 아침 사과는 금! (과일을 좋아하는 다솜이는 내가 과일을 먹을 때면 당연히 같이 먹는 거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루틴에 넣어둔 것 같다. 치킨, 고기 등 강아지가 못 먹는 음식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유독 과일과 고구마는 자기도 먹어야 된다며 주장을 펼치곤 했다. 나도 그에 맞추어 과일을 준비할 때 강아지용 작은 조각도 마련해두곤 했다.)

오전 11시: 옷장 앞으로 누나를 데리고 가서 산책 준비를 시킨다. 뭉그적거리는 누나를 준비시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 있는 힘껏 꼬리와 엉덩이를 씰룩대야 한다.

오후 12시: 밤새 동네가 무사했는지 한 바퀴 순찰을 돈다. 아파트 밖으로 나서자마자 미리 정해둔 전봇대에 순서대로 마킹을 한다. 처음 3~4개까지는 정해진대로 마킹을 하고, 그다음부턴 발길이 닿는 대로 동네 순찰을 한다. 때로는 공원이 궁금하기도 하고, 때로는 옆단지 아파트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기 때문에.

오후 1시: 산책 후에는 세면대에서 발을 닦는다. 수건을 펴주면 알아서 발의 물기를 닦고 얼굴도 야무지게 닦아낸다. (다솜이는 정해진 일과를 소화하기 위해, 사소한 귀찮음은 참을 줄 아는 강아지이다. 산책을 나가기 위해 옷을 입고 목줄을 차는 일련의 과정을,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빛의 속도로 소화해 낸다. 또 깔끔한 것을 좋아하기에, 산책 후에는 발을 닦고 세수를 하는 것을 ‘참아낸다’.)

오후 3시: 펫밀크로 목을 축인 뒤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다. 단, 이 시간에는 오로지 강아지만 잠을 잘 수 있다. 가끔 누나가 낮잠을 자려고 방에 들어가는 순간, 다시 거실로 나오라고 ‘멍!’ 하고 짖는 것도 중요 루틴이다. (다솜이는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해가 떠있는 낮시간에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의 낮잠은 도통 허락하지 않으면서, 내가 일할 때에는 늘 담요 위에 널브러져서 자곤 했다. 한 번은 온라인으로 강의를 진행하는데 다솜이의 코 고는 소리가 그대로 수강생들에게 송출되기도 했다.)

오후 4시: 누나가 작업실에서 일을 하는 날이면, 오후 4시쯤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다. 현관 앞으로 먼저 나와서 이제 집에 가자고 시위를 한다.

오후 7시: 저녁산책 겸 퇴근하는 작은 누나를 마중 나간다. 저 멀리서 작은 누나가 걸어오는 게 보이지만 쑥스러우니까 호들갑 떨며 아는 척하지는 않기로 한다. 발냄새로 안전한 지만 확인하면 그만이다.

오후 8시: 저녁밥으로 수비드 소고기를 먹는다. 늘 먹던 걸 먹는 걸 좋아해서, 가끔 다른 걸(이를테면, 연어) 주는 날이면 코로 밥그릇을 엎어버린다.

오후 10시: 누나들이 운동을 갔다 오는 시간이다. 집에 혼자 있는 동안 간식 트랩에서 쏙쏙 간식을 빼먹고 기다리면, 제시간에 현관문이 열린다. 가끔 더 늦게 오는 날이면 루틴을 지키라고 크게 호통치기도 한다. 한 시간 만에 만나도 얼마나 반가운지, 앞발을 낮추며 엉덩이를 실룩실룩하면, ‘나 잡아봐라~’ 놀이가 시작된다. 숨어있는 누나들을 다솜이가 찾아내면, 이번엔 다솜이가 도망가는 걸 누나들이 잡는 놀이이다.

오후 11시: 슬슬 잠이 오기 시작한다. 다른 가족들이 자러 갈 때까지 거실 소파 왼쪽자리, 다솜이 고정석에서 자고 있기로 한다.

오전 12시: 누나가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갈 때 따라 들어간다. 이때 중요한 건, 가족이라면 다 같이 자야 한다는 원칙이다. 원래는 다른 방에서 자던 작은 누나도 불러내어 ‘셋이 다 같이 자기’를 한다. 물론, 다솜이가 가장 가운데 자리. 가끔 엄마가 오는 날이면 ‘넷이 다 같이 자기’를 해야 한다.


헉! 헉! 적어놓고 보니 아침부터 밤까지 쉴 틈이 없다! 다솜이의 계획들은 필연적으로 주보호자인 내가 같이 따라야 하기 때문에, 게으르고 즉흥적인 나로서는 계획적인 하루가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다솜이만의 규칙이 생기고 주장이 강해져 갈수록, 오히려 나는 안심했다. 이렇게 시간대별로 따르는 루틴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다솜이가 우리 집에 잘 적응하고 안정을 찾았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다솜이의 피곤한 주장들을 다 받아주고만 싶었다. 아픔을 하나도 모르는 아이처럼, 마냥 어리광 피우고 원하는 것은 모두 하게끔 하고 싶었다.


나는 종종 다솜이가 집에 오기 전 과거를 상상해보곤 한다. 계획형 J 강아지인 다솜이는, 혹시 길거리 생활을 하고 보호소에 들어간 것을 계획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예전에 생활하던 곳이 무언가 탐탁지 않아, 더 나은 삶을 살아보고자 스스로 이 모든 것을 계획한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우리 집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거실 한가운데 왕자리를 차지하고, 온 가족의 생활 루틴을 자신에게 맞추도록 한 다솜이. 이렇게 빨리, 제 집인 양 편하게 적응하고 안정을 찾은 이 강아지를 보고 있자면, 내 상상이 어쩌면 마냥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 다솜이의 촘촘한 계획 하에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웃음을 지어 본다.


잘 시간이 지났는데 데리고 나와서 언짢은 다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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