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도 달려도 평지가 이어지는 무변 광야는 어지럽다.
땅의 끝은 바다요 바다와 땅 사이를 하늘이 잇댄 드넓고 깊으며 푸른 궁창, 그 사이로 빛이 투명하게 투시되는 허공에선 새소리도 더 낭창하게 퍼진다. 땅 위에 길을 트면 직선의 고속로, 곡식을 심으면 가없는 평야, 그냥 두면 초원이 되는 순한 지구의 생명력이 실감 나게 느껴지는 번다버그. 밤이면 금붙이 비벼 돋을새김 한 별빛 도드라지고, 밤새 도둑처럼 내린 젖빛 수액을 동트는 햇살이 흡입하는 이 땅으로 온 지 일 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어지럽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예천에서 난 산골소녀가 산은 차치하고 둔덕조차 없는 푸른 사탕수수밭 사이에 튼 길 위를 달린다. 저 끝이 가물가물한 직선의 차로를 백 킬로로 씽씽 달리는 차들이 어지러워 느릿느릿 가다 보면 뒤차가 휙휙 추월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길을 잃어 올라간 언덕에선 헛웃음이 나왔다. 마을 이름이 하묵이라는, 이 낮은 둔덕이 이 지역에서 제일 높은 망루, 유일한 전망대라니.
평원이 고집스레 이어지는 땅, 이곳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은 지루하다. 눈 뜨면 초록이니 시나브로 초록 권태에 든다. 가을 단풍과 낙엽은 자취도 없으며 늘 푸름이 본드처럼 땅에 착 달라붙은 곳. 겨울이라는 이름은 아침저녁으로 좀 더 쌀쌀하기만 하니 두툼한 겨울 코트가 필요 없는 이곳은 옷장도 밍밍하다.
농사꾼의 가업을 물려받지 않은 젊은이는 도회지로 떠나고, 그들이 남긴 틈새를 타국에서 온 대학생 노동자들이 메운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들고 온 학생들은 첫 일 년 동안 어느 낯선 도회지에서 일하거나 공부하거나 여행을 한 후, 세컨비자를 받기 위해 농촌지역인 번다버그로 모여든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학생들이 꽤 많아서인지, 인근 도시가 팽창한 때문인지 브리즈번에서도 네 시간이나 걸리는 이 먼 곳에 한국 마켓이 두 군데이고, 올 오월에는 한국 뷔페집이 차려졌다. 두 주후에는 코리언 헤어숍을 오픈하고 이미 카센터는 작동 중이다. 아 한국교회도 하나 있다.
평원과 바다와 하늘이 끝없이 이어지는 낯선 땅 위에서, 타국 사람들은 백인들 틈에서 실존을 이어간다. 토마토와 주키니와 딸기밭에서 오렌지색 안전조끼를 입고 뙤약볕에 엎드려 열매를 딴다.
말이 통하지 않아 때로는 바디랭귀지를 할 것이고 어순과 발음이 서로 엇갈려 패스패스하면서도, 가차 없이 작열하는 호주의 타는 태양 아래에서 흙내와 땀내를 완강하게 내뿜으며, 빠르나 정확한 손놀림으로 열매를 따 담고 품삯을 엄중하게 챙길 것이다. 오늘도 엘리엇 헤드 비치로 가는 길목에서 모자와 마스크를 쓴 수십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호박 밭고랑에서 흙 때 묻은 바스켓을 채워가는 광경을 보았다. 어디서나 노동은 신선하고 신성한 생명력이나, 나는 가슴이 짠해온다. 특히 이역만리 타국에서 몸을 굽혀 육체노동에 시간을 바치는 한국의 젊은이들 모습이 내겐 그렇다. 그러나 힘든 만큼 단단한 사람살이의 근육이 그들 몸 어딘가에 당당히 새겨지리라.
거대한 기계로 사탕수수밭을 뭉개듯 들이대어 적당히 알이 찬 수숫대궁을 적정한 길이로 토막 내어서 공장으로 쉼 없이 나르는 건 이곳 본토의 힘센 농부들 담당이다. 덕분에 사탕수수를 삶아내는 설탕공장 굴뚝은 밤낮없이 뭉게구름 같은 김을 뿜어내면서 ‘번다버그 슈거’를 제조한다. 또 해바라기 밭가에서는 ‘프라이 데이 플라워마켓’을 오픈하여 갓 꺾어 온 꽃다발을 파는 아가씨에게서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의 시골처녀 오드리 헵번이 연상되기도 한다.
어느 날은 노랗게 핀 해바라기 꽃들의 모가지가 축축 쳐져서 시들어 버리거나, 수박덩이를 단 수박넝쿨이 온통 갈변되어가는 생명의 꺾인 시간 앞에서 내 가슴이 다 뻐근해지는 건 왜인지 나도 잘은 모른다. 다만 마카다미아, 아보카도, 망고나무가 끝없이 도열한 과원의 풍경은 낭만이 아니라 이 고장의 실존이라는 것, 겨울이라 불리는 농한기가 따로 없으니 돌아서면 곧바로 파종을 하는 농삿거리가 목 빼고 기다린다는 건 분명한 땅의 일상이다.
호주 남부 사람들이 카라벤을 끌고 이곳 번다버그로 올라와서 서너 달의 겨울을 나고 다시 내려가는 것도 이들 삶의 한 방식이다. 또 은퇴자들이 몇 달 동안 호주 전 지역을 돌아보다가 따스하고 서늘한 기후에 이끌려 이곳에 정착하는 모습도 이 낯선 땅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살이의 한 전형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바다 가깝고 풍경도 좋지만 옷가방이 가벼워서 이곳으로 몰리는지도 모른다. 여행 가방과 이삿짐이 가볍다는 건 얼마나 더 홀가분한 일인가.
그래도 낯선 일상이 몇 달 동안 지속되면 지루해진다.
평원 너머의 산 같은, 색다른 풍경에 마음이 근질거린다.
하지만 초록 권태에 든다는 건, 시간을 부리는 데 서투른 습관이 아닐까. 초록의 시공을 온전히 껴안지 못해서 하는 몸짓. 초록빛의 채도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헤아리지 않은 게으른 도피. 하늘과 바다와 땅 사이의 신비를 모르는 무지.
마주한 현재의 내 시간에 나의 색깔과 나의 방식으로 이제 말을 걸어보리라.
어지러우면 어지러운 대로, 조촐하면 조촐한 대로, 권태로우면 권태로운 대로, 고독하면 고독한 대로, 기교 없으면 기교 없는 대로. 자연의 숨에다 후후~ 내 들숨과 날숨을 섞는 거다. 여행자 같은 낯선 나의 시간 속을 갓 난 애벌레처럼, 우직한 초록빛 사이로 흙내를 맡으며 굼틀거리는 몸을 밀고 나아가는 게 낡지 않는 사람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