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큰딸한테 내가하던 말이다. 미련곰탱이같이 속으로 꾹 물고 있지 말라고 했다.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잘 안 하는 게 염려되어서다. 엄밀히 따져보면 아이의 강한 특성상 그럴리야 1도 없겠지만, 힘들고 또 힘들면 행여 속병이 날까 봐 어미로서 안쓰러운 마음을가지고 있기 때문에,그리 말한다. 할 말 하고 가벼워지는 게 건강상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 엄만 자식 편이니까.
그러다 어느 날은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잘못 가르치지 않았을까, 하고. 어느 날 아이가 나한테 이렇게 말한다. 엄마, 가만히 보면 내가 얼마나 못된 아이인지 몰라. 우리 회사 직원들이 내가 엄청 못됐다고 할 거야, 아마. 그 말을 받아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카리스마도 때론 필요하지. 그러나 그럴수록, 네가 할 일을 아주 깔끔하게,최선을 다해처리해 놓고, 못된 짓? 도 해야 해. 나이 들수록 실력 없고 말만 많아지는 상사, 그런 민폐, 아니 밉상도 없어.어언 서른 중반이 된 딸한테 내가 웃으며 그러자 그녀는 또, 맞아 엄마, 일 잘해야지 그럼. 난 그건 자신 있다, 걱정하지 마,한다.
졸업하고 취업이 안되어 애면글면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요즘은 회사에서 신입으로 들어오는 직원에게 일을 인수인계해 줄 일이 생기나 보다. 방법을 알려주면 일을 못 따라오는 직원 때문에 몇 번이나 골머리를 앓는 아이가 힘들어 보였다. 같은 팀의 신입동료일처리가 제때 안될 땐, 그녀가 일을 떠맡아 야근까지 하려네, 사위가 성실히 도와주지만5세 3세 아들 둘 키우려네, 살림하려네... 멀리 사는 딸이 짠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난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 할 말은 하라고. 보아하니 안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삶이 마냥 힘겨울 때 믿는 구석, 엄마보다 더 좋을 데는 없을 것이니.
잘해 줘, 이쁘게 말하고.
이 말은 딸의 친구들하고 잘 지내라는 언질이다. 넷이 만나는 그니의 친구는 나도 아는 사이니, 딸은 가끔 제 친구들의 소식을 전해준다. 주말이면 가족여행도 함께 다니고, 플레이 그라운드에도 같이 가고, 집집으로 돌아가며 놀고, 와이프들끼리 차를 마시며 웃고. 그 와중에 감정이 살짝 상하기도 한다. 누군가 힘든 일도 생긴다. 난 그때는 이런다. 이 세상에 완전한사람 없어. 잘해줘라. 상처받지 않도록 이쁘게 말하고. 그래야 너도 힘들 때 위로받고 살지. 그러면 딸은 응, 알겠어,걱정하지 마, 한다.
자연 색감은 그대로 좋다.
몬레 포 비치를 걷다가 해풍이 여름 햇살을 이기지 못할 땐 좌회전을 한다. 목재 데크를 통과하면 바로 숲길로 이어진다.그날도 그 해변을 걸었다. 그날따라 파도에 밀려온 조개껍데기와 잔돌 무더기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햇빛과 해수가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 놓은 그 색감이 그대로 좋았다. 나는 걷다 말고, 그냥 좋아지는 조약돌을만나면 엎드려 하나씩, 둘씩 손바닥에 얹어보았다. 자연에 물든 자연색은 볼수록 이쁘다.
손이 모자라는데 다행히 바지 뒷주머니가 있었다. 햇빛과 해수와 해풍에 의해 순하게 닳은 조약돌들은 내주머니를순한 곡선으로 채웠다. 그땐 어쩐지 기분이 그득해진다. 여름 정오의 햇빛을 못 이긴 우린 숲 속으로 발길을 돌렸다. 몬레 포 해변의 꽃이 조약돌이라면, 숲 속엔 오리지널 꽃, 야생초가 있었다. 나는 돌을 줍듯이 이번엔 똑똑, 숲길의 잎들을 따서 모아보았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그냥 좋았다.
때론, 말이 없어 더 이쁘고.
오솔길에서 모아본 잎과 돌, 그들의 공통점은 말이 없는 거였다.자연의 색감 그대로 내면을 표현하고 있었다. 모난 데 없이 편안하였다. 세상 모든 건 부모 없이 태어난 건 없다. 하다못해 샤프펜슬 한 자루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처음엔 숯검정 같은 흑연으로 시작하였다. 지금 내 손에 든 잎과 돌의 시원을 거슬러가 보면, 나의 조상아담과 이브보다 더 고대의 조상을 선조로 두었을 게다. 그래서 나보다 더 깊은 건가. 그래서 말없이, 단단하게 입을 꼭 다물고서도이토록 이쁘고 부드럽게 있는가, 싶었다. 때론, 말이 없어 깊어진다.
서른 중반의 연식이 된 딸도, 세상을 알만큼 알게 될 나이다. 부모라고 이러저러한 걸 가르칠 시기는 넘어섰다. 그저 묵묵히 뒤를 봐주면서 겸허하게 바라보면 될 것이다. 그러면 내 딸도 자연하게 잎과 돌의 색감을 제 몸에 입혀나갈 터이니, 스스로깊어질 테다. 나는 숲길이 끝나는 곳에서, 늘 쉬어가던 우리의 탁자 위에다 내가 가져온 자연을 배열해 보았다. 모양이 다 달랐다. 편안하고 자연한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누군가의 딸이거나 아들이었을, 이들의 모양새와 색감이 대견했다.표정에 동요가 없는 잎과 돌, 그들이 이쁘면서 듬직했다. 맞다. 때론 말이 없어 더 이쁘다. 깊다. 난 그런 엄마가 되련다. 때론 말이 없어이쁜 엄마.깊은 엄마. 그리고 딸도 깊고 이쁜, 그런 엄마.자연하게 이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