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부엌살림에 관심을 갖고부터 우리 집부엌엔 계측기구가 생겨난다.빨간 눈금이 그려진 계량스푼과 계량컵과 푸드저울이 내겐 사치품이라 사료되던 물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딸은 도마바깥에 운동장처럼 생긴 플라스틱, 그것을 도마발밑에다 고이 신겨놓았다가 썰어진 야채들을 그리로 그냥 밀어내어 담는 이상한 물건도 들였다.
30년이 넘도록 목측에 길들여진 나의 사고방식은 그런 계측품들이, 남의 것처럼 멀뚱하게 쳐다보이는 괴이한 부엌물품일 뿐이다. 야채와 고기를 후딱후딱 썰거나 다져 넣고, 눈대중으로 간장 소금 참기름 마늘 파를 재바르게 때려 넣어,냄비뚜껑을꼭 닫아 뽀글뽀글 끓여 먹어야 맛이 더났다.하나하나 따져서 간장을 재고, 밀가루를 저울에 달아서 쿡을 하는 건 번거롭기 그지없는, 소꿉장난 같은 거라 생각했다.
그저께 칼리할머니가 마실을 오셨다.
마침 딸도 집에 있었다.셋이 함께 웃고 떠들고 놀다가 나는, 그녀가 며칠 전 쿡해서 들고온 비스킷을 딸이 엄청 좋아했다고,레시피를 좀 알려달라고 했다. 딸이 받아 적고 그녀가 부르기 시작했다. 난 시작부터 그녀의 입에서 술술술 딸려 나오는 버터 250그램, 어 컵 오브 슈거라는, 계측된 숫자를 들으면서 속으로 놀랐다. 하지만 흐름을 방해할까 봐 잠자코 있다가, 마당에 나가서 빨래를 걷었다. 여긴 햇빛이 너무 강하여 대낮엔 흰가운이나 흰 티셔츠는 마르기가 무섭게 걷어야 하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탈 듯이, 누렇게 얼룩이 질 수도 있다.
그녀의 비스킷 레시피는 이랬다.
비스킷 36조각분이라 했다. 250그램 버터(노 no, 마요네즈), 1컵 슈거에 계란 2개를 넣어 서로 잘 섞는다. 2컵 셀프 라이징 밀가루를 넣어 믹서용 기계를 돌려 섞고 1컵 건포도를 붓는다. 1 테이블 스푼의 밀크를 넣고 섞는다. 3스푼의 콘플레이크를 바닥에 깔고 먼저 반죽된 레시피를 36조각으로 나누어서 콘프레이크를 앞뒤좌우(고물 묻히듯 하라는 뜻)로 입힌다. 오븐용 납작한 쟁반에 다담다담 담는다. 오븐에 넣어 180도 15분 간 굽는다. 중간중간 색깔을 체크한다. 브라운으로 변할 때까지 구우면 된다.
빨래를 개면서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칼리, 너는 레시피 숫자를 어째 다 외워? 하자, 칼리 할매 불현듯, 우스워죽겠다는 듯 엎드려 깔깔대신다. 그러더니 자신의 폰을 들어 동영상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깊은 추억으로 저장된 동영상이라도, 지나간 건 묻힌 과거처럼 찾아내기 어렵다. 우리의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내기란,한숨에 짠, 하고 머리에서 팝콘인양 톡톡 튀어나오지 않는다. 기계에 든 과거도 마찬가지다.
한참 후 그녀가 동영상을 내놓았다.
몇 달 전, 내가 그녀에게 알려주던 김밥레시피 동영상이다. 경상도 억양의 한국말은 제아무리 태평양을 건너와도 변하지 않는다. 거친 보리문둥이 그대로다. 아니, 어쩐 일인지, 한국에 살 때보다 경상도 발음이 심해졌다. 결혼 후 경기도 깍쟁이들 속에서 서울말을 그래도 20년을 듣고 말하며 살았었다. 그리고 영어권 외국생활 16년 차가 되었다. 투박한 경상도 언어티를 벗고 말 끝을 새의 꼬리깃털처럼 우아하게, 살짝, 추켜올리던 발음은 언제부터인가, 내 안에사라지고 없다. 내경기도 억양은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동영상에서 들려오는 투박하고 서툴고 흔들거리는 동양인 여자의 영어발음은 내가 들어도 우스웠다. 개그도 그런 개그 없다. 그뿐인가. 나의 레시피엔 1컵, 250그램.. 이런 숫자는 없었다.참기름 좀 많이, 맛소금과 식초는 쪼끔만,... 의눈대중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의 사고는 두 사람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그게 우스웠나.
동영상을 보며 우린 엄청 웃었다. 동서양 팝콘이 어울려 톡톡톡 터졌다. 벚꽃봉오리가 벙글어 화사한 벚꽃나무가 되었다. 비스킷의 버터향이 벚꽃향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