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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혁 Feb 05. 2020

[주짓수 에세이] 낄끼빠빠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야 하는 힘

어느 날 친구가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 후임 두 명이 택시를 타고 이동 중에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친구는 두 명중 한 명은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고, 다른 한 명은 아무 이상 없이 멀쩡하다고 했다. 아이러니했던 점은 다친 후임은 사고가 나는 순간을 직면했다는 것이고, 멀쩡한 후임은 깊게 잠든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떻게 사고를 직면한 후임은 순간 몸이 반응했을 텐데 오히려 더 다치고, 잠을 자느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후임은 멀쩡할 수 있는 거냐고 말이다.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주짓수가 떠올랐다. 스파링 할 때를 머릿속에 그려보니 그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낄끼빠빠. 주짓수를 포함한 모든 운동에서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힘이다. 주짓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과 스파링을 해보면 백이면 백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쓸데없는 힘은 여러 문제를 발생시키곤 한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힘을 계속해서 쓰다 보면 체력이 급격하게 소진될 수밖에 없고, 힘은 몸을 뻣뻣하게 만들기에 균형감각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보다 큰 문제는 쓸데없는 힘이 부상의 주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주짓수를 오래 한 사람들은 종종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곤 한다. “몸 곳곳이 다 말썽인데 대부분 흰 띠 때 다친 부위에요.” 나 또한 현재까지 말썽인 무릎과 뒷목은 흰 띠 시절에 다쳤던 부위다. 다친 이유는 대게 비슷했다. 힘을 줘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평소보다 무리해서. 힘을 쓰면 불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주짓수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던 당시의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사고였던 것 같기도 하다. 힘은 쓸덴 써야 하지만 잘 못 쓰면 몸을 망가뜨리기도 하기에 양날의 검과도 같다. 친구가 이야기했던 아이러니했던 교통사고 또한 이와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힘을 빼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자주 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확한 자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에 뜨기 위해서는 자주 물에 들어가 물에 뜨기 적합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처럼 주짓수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잘 안되지만 자주 하면 할수록, 정확한 자세를 알면 알수록 쓸데없는 힘은 자연스레 빠지게 된다. 그렇기에 몸에 쓸데없는 힘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시간만이 약이니깐. 시간이 걸리겠지만 힘이 빠지고 나서야 수영을 즐길 수 있게 되듯, 힘이 빠지고 나야 주짓수도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점은 몸을 쓰든 모든 분야의 공통점일 거라 생각한다.


살아가기 위해선 몸을 써야만 하기에 쓸데없는 힘은 삶과도 관련이 있다.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다. 누구라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유모를 긴장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 그래서 평소에도 몸이 경직되어 있고 작은 것에도 크게 놀라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사람들에 속한다. 이제는 그런 몸상태에 익숙해져 몸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을 정도다.


하루는 방 청소를 하다가 오래된 수첩을 발견하곤 놀란 적이 있다. 군인 시절 가지고 다니던 수첩이었는데 긴장에 관한 메모가 꽤나 많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몸에서 긴장이 풀릴지 혼자서 고민했던 흔적이었다. 환경 상 군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고등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다가 핸드폰 진동소리만 울려도 화들짝 깼기에 잠들기 전이면 잊지 않고 핸드폰 모드를 무음으로 바꿔두었었다. 그때부터라면 나는 10년이 넘게 몸에 쓸데없는 힘을 준 채로 삶을 살아왔다는 소리가 된다. 깊은 잠에 드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기에 날이 갈수록 신경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긴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의 누이로부터 들은 적도 있다. 누이는 정신의학과에서 신경안정제를 처방받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약만 먹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잠이 쏟아진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누이는 어쩔 수 없이 병원을 다시 찾게 되었다. 약에서 수면제를 빼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의사는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다. 처방한 약에는 수면제 성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의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신경안정제를 먹고 잠이 쏟아지는 건 평소에 그만큼 긴장을 많이 한다는 소리에요.”, “긴장이 갑자기 풀리면 잠이 쏟아질 수밖에요.” 술만 마시면 기절하듯 잠에 빠졌던 나는 누이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삶이 운동이라면 나는 매일 똑같은 운동을 한 셈이다. 그런데 오랜 반복에도 불구하고 몸에선 쓸데없는 힘이 빠지지 않았다. 군인 시절의 노트를 보면 알 수 있듯 나는 오랜 시간 이 점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운동에서 쓸데없는 힘을 빼기 위한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자주 해야 했고, 정확한 자세를 알아야 했다. 하지만 삶에 있어서 반복은 죽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니 남는 건 자세뿐이다. 삶에 있어서 정확한 자세가 뭔지 알게 되고, 그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쓸데없는 힘은 자연스레 빠지게 될 것이다.


정확한 자세를 삶에 빗대어 본다면 무엇과 연결될 수 있을까? 나는 '정답'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정확한 자세에 나를 맞춘다는 건 삶의 정답에 나를 맞춘다는 걸 의미한다. 각자가 생각하는 삶의 정답은 각자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맞추게 되면 보다 행복해질 것 같은 것, 그렇기에 계속해서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정답일 테니 말이다. 한데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어서인지 사람들의 정답은 대게 비슷하다. 누구에게나 삶이라는 시험지는 백지상태로 주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백지는 수능 시험지와 같이 보편적인 시험지로 변모하는 것 같다. 문제는 보편적인 시험지에 맞는 보편적인 정답이 우리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시험 두려워했다. 누구나 그렇듯 시험 자체가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채점이 끝나 점수가 매겨진 시험지가 두려웠다. 동그라미가 아닌 빨간색 사선으로 난무된 시험지를 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갈 땐 그 어느 때보다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시험지가 담긴 가방을 방 모퉁이에 내려놓는 순간, 그 순간부터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게 되었다. 긴장한 듯 몸은 경직됐고 작은 것에도 크게 놀라게 되었다. 마음 졸이던 나는 어린 마음에 기도를 하곤 했다. 부모님의 입에서 시험은 어떻게 봤냐는 말이 나오지 않기를, 제발 그 상황만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신은 내 기도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결국 매번 매 맞게 된 걸 보면 말이다.  


어른이 된 내가 마음을 졸이게 된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되었어도 내 삶엔 빨간색 사선 투성이었으니 말이다. 어릴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채점을 는 사람과 점수를 확인하는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어릴 땐 정답을 몰랐기에 선생님의 채점이 필요했고, 보호자인 부모에게 평가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정답을 잘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채점을 매겼고, 부모를 대신해서 스스로 나를 평가하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나는 겉보기엔 어른이 되었지만 점수가 매겨진 시험지를 들키고 싶지 않은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삶을 살아온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보편적인 정답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한 나, 그러니 몸에 쓸데없는 힘이 들어갈 수밖에.



삶에 있어서 정답은 말뚝과도 같다. 나는 그런 말뚝에 목줄이 메어있는 꼴이었다. 정답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목줄은 내 목을 더 조여 왔다. 숨이 막힐 때쯤 돼서야 말뚝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정답? 대체 누가 만든 정답인 거지?” 보아하니 운동에서도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정확한 자세라는 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쿼트를 할 때 무릎이 발끝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 정확한 자세라 여겼지만 신체 구조에 따라 그 선을 넘어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정확한 자세가 어떤 사람에겐 독이 되기도 했다. 정확한 자세보다 중요한 건 나에게 맞는 자세였던 것이다. 주짓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짓수에는 레안드로 로라는 월드클래스 선수가 있다. 가끔 그 선수의 탑포지션 플레이를 보다 보면 놀라게 될 때가 있다. 몸놀림이 활어처럼 파닥이는 게 도저히 탑클래스 선수의 움직임이라 보기 어려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 선수는 그만의 특유한 움직임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따져보니 정확한 자세도, 같은 자세도 없었다. 각자에게 맞는 각자만의 자세가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몸에 맞으면 조금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자세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삶도 마찬가지였다. 우선시 되어야 할 건 남들이 만들어 놓은 정답이 아닌 생겨먹은 대로의 나였다. 생겨먹은 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동안 손 대볼 생각도 못했던 말뚝에 손이 가기 시작했다. 말뚝에 손을 갖다 대자 어이없게도 힘없이 뽑혀버렸다. 익숙지 않은 물속에서 힘을 빼는 데까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듯, 삶에서도 쓸데없는 힘은 서서히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다. 힘이 빠진 자리에는 점차 즐거움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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