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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혁 Feb 05. 2020

[주짓수 에세이] 그리움2

'좋아함'의 분명한 척도, 그 뒤에는...

“제주도에 갔다 오시고 나서 실력이 엄청 느셨어요.” 관장님이 벨트에 그랄을 감아주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의아했다. 두어 달 동안 서귀포에 있으면서 주짓수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구의 집에서 묵으며 아침마다 섬으로 나가 스쿠버다이빙을 한 게 전부였고, 밤이면 파도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셔댔다. 그랬기에 제주도에서 돌아와 다시 주짓수를 할 땐 다시 적응하는 데 까지 시간이 걸릴 거란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실력이 갑작스럽게 늘었다는 말을 관장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관장님이 나와 스파링을 하며 몸소 느끼셨을 거기에 그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의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여름, 다시 제주도를 찾게 되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아침마다 스쿠버다이빙을 했고, 밤마다 술을 마시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허나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매일 주짓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작년에 주짓수를 하지 못해 고통스러웠던 나는 나름의 궁리를 했다. 서귀포에 있는 체육관을 등록해봐야 작년처럼 자주 못 나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순간 머릿속에 퍼즐매트가 떠올랐다. 때마침 친구의 집에는 빈방도 있었다. 매트의 가격을 알아보니 두께가 얇은 건 비교적 저렴한 편이었다. 방 사이즈에 맞추려면 3m X 3m가 필요했는데, 가격을 측정해보니 두 사람의 체육관 한 달 등록비보다 훨씬 저렴했다. 나는 들떠서 친구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당장 주문하라고, 안 사주면 육지로 돌아갈 거라고. 친구도 주짓수를 즐기기에 흔쾌히 동의했다.

 


오랜만이었다. 물건을 기다리며 설렌 건. 택배를 기다리며 수십 번 배송 조회를 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매트가 서귀포 인근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왜 안 오는 거지? 직접 찾으러 가야 하나?”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기다림에 지쳐갈 때쯤 핸드폰이 울렸다. “화물택배 30분 후에 도착합니다.” 훌륭한 타이밍이었다. 스쿠버다이빙을 마치고 돌아와 장비를 세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장비를 세척하고 택배를 맞이했다. 묵직했다. 1m X 1m 사이즈의 매트 9개가 한 포대자루에 담겨왔기 때문이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외치곤 뭐에 홀린 사람처럼 포대자루를 질질 끌고 빈 방으로 들어갔다. 곧장 쪼그리고 앉아 매트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깔아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럴싸했다. 3m X 3m 사이즈는 둘이서 주짓수를 하기에 충분했다. 그날 밤부터 나는 친구와 단둘이 주짓수를 시작했다. 체육관에서처럼 똑같이 스트레칭을 하고, 드릴을 하고, 기술 연습을 하고, 스파링을 했다. 덕분에(?) 마시게 되는 술의 양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술을 마시기도 전에 주짓수에 흠뻑 취해버렸기에.



문뜩 작년에 관장님이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제주도에 갔다 오고 나서 실력이 갑작스럽게 늘었다는 그 말이. 1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내가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움이라는 척도로 인해 주짓수를 얼마만큼이나 좋아하는지를 알게 된 나, 그런 나의 내면엔 변화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주짓수를 하지 못함의 힘듦을 반복하기 싫어 타지에서 매트까지 깔게 된 것만 보더라도 그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뿐일까? 아닐 것이다.


두어 달 동안 못했던 주짓수를 다시 하게 되었을 땐 매 순간 더 집중하게 되었을 것이다. 체육관 밖에서도 주짓수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떨어져 있었던 연인과 재회 후 더 큰 사랑이 싹트게 되는 경우처럼. 그러한 나의 변화가 실력에 묻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관장님이 그 차이를 몸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역시나 그리움, 그 짧은 즐거움 뒤에는 괴로움만 있는 것 아니었다. 괴로움 뒤에는 태도가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괴로움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한 태도가. 그리고 그리움을 불러일으킨 대상을 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태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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